‘가을 잔치’는 끝났다. SK는 2010년 이후 8년 만에 챔피언을 되찾은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여전히 바쁘게 돌아간다.
SK는 13일 새 사령탑으로 염경엽 단장을 임명했다. 계약기간 3년에 계약금 4억원, 연봉 7억원 등 총 25억원의 파격적인 특급 대우를 했다. 역대 감독 최고 연봉이다. 일찌감치 이별을 예고한 ‘우승 사령탑’ 트레이 힐만 감독은 병상의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16일 미국으로 떠난다.
SK는 기쁘다. 통산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가을의 전설’을 만들었다. 2007년과 2008년 두산, 2010년 삼성을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 SK 3번 최정이 1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 9회초 1사 후 린드블럼으로부터 4-4 동점을 만든 좌월 1점포를 날린 뒤 1루로 달려나가고 있다.(위쪽) 4-4 동점이던 연장 13회초 2사 후 2번 한동민이 결승포가 된 우중월 1점포를 날리고 1루를 돌면서 환호하고 있다.(아래)
또 해냈다. 2007년 팀의 막내 또래로 포스트시즌에 참여했던 박정권, 김강민, 최정, 김광현은 시나브로 고참이 됐다. 올 가을엔 후배들을 이끌었다. 한동민, 강승호 등이 멋지게 화답했다. 명승부를 연출했다.
누군가는 ‘신구 조화의 결실’이라 하고, 누군가는 ‘베테랑의 힘이 전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11월 12일 잠실구장, 한국시리즈 6차전. 최고의 명승부였다. 연장 13회까지 5시간 7분의 혈투 끝에 5-4로 긴 승부를 마무리했다.
‘관심 집중’은 시청률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닐슨 코리아의 조사 결과 6차전 시청률이 13.0%. 이날 방송된 일일연속극 ‘비켜라 운명아’ (16.4%)에 이어 전체 프로그램 중 2위였다. 올해 5차전 신청률도 11.0%였다.
SK는 올 시즌 내내 홈런포를 앞세운 ‘새로운 힘의 야구’를 선보였다. 체계적인 선수 육성 시스템의 결실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어떻게 하면 선수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입증했다. 어떤 영화, 어떤 드라마보다 재밌는 짜릿한 승부를 팬과 함께 즐겼다.
SK의 가을은 화끈했다.
# 첫 경험 - 힐만 감독, 한동민, 강승호
SK의 우승을 점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거의 없었다.
모두 두산의 우승을 점쳤다. 두산이 정규 시즌에서 ‘극강’의 전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투타 조화가 최상인데다 수비도 늘 안정적이니 어느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라와도 힘겨울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공은 둥글었다. SK는 한방으로 승부를 확 뒤집는 힘이 있었다. 홈런의 힘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높이 들었다.
▲트레이 힐만 감독(왼쪽)은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우승을 이끈 첫 사령탑이 됐다. 한동민과 강승호(오른쪽)은 처음으로 챔피언 반지를 끼는 자릿한 경험을 했다.
트레이 힐만 감독은 일본 니혼햄 파이터스에 이어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 로열즈를 거쳐 한국 땅을 밟았다. 똑같은 야구이니 꺼릴 이유가 없었다. 니혼햄 파이터스에선 재팬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이젠 코리안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했다. 일본과 한국에서 우승을 경험한 최초의 ‘명장’으로 남게 됐다.
한동민과 강승호는 ‘힐만의 아이들’이다. 감독의 전폭적인 믿음에 보답했다.
한동민과 강승호는 언제든 홈런을 날릴 수 있는 타자다. 한동민은 붙박이 2번, 강승호는 공격력 강화가 필요할 때 주로 8번으로 상대 투수를 위협했다.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강한 효과를 나타냈다.
4-4 동점이던 연장 13회초 2사 후. 2번 한동민이 타석에 섰다. 두산의 8번째 투수로 마운드를 지킨 왼손 유희관이 초구를 던졌다. 밋밋했다. 가운데로 들어왔다. 한동민은 주저하지 않았다. 시원스레 방망이를 돌렸다.
제대로 맞았다. 우중간 담장 너머로 큼지막한 포물선이 생겼다. 외야석 상단에 떨어졌다. 135m를 날아갔다.
한동민이 기쁨의 함성을 쏟아내면서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SK의 통산 4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결승 홈런이었다. 이 한방으로 MVP의 영광까지 누렸다. 짜릿한 첫 경험이었다.
한동민의 ‘가을 야구’는 극적이었다.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도 연장 10회말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힘으로 가을 야구의 주인공이 됐다.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를 포함한 올해 포스트 시즌 타율은 1할6푼7리. 안타는 7개가 전부. 그러나 영양 만점의 홈런이 4개다.
한동민은 찬스에 강한 ‘공포의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강승호는 무명이다. 확실한 주전도 아니다. LG에서 SK로 이적한 유망주 정도였다. 그러나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좋은 팀에 와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야구를 하게 돼 좋았다”는 말로 기쁨을 대신했다.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주전 2루수 겸 8번으로 나갔다. SK가 1-0으로 4회초 2사 1루에서 두산의 두 번째 투수 이영하를 초구부터 두들겼다. 좌월 2점 홈런. 두산의 추격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 값진 아치였다. 2군 생활의 아쉬움까지 모두 날려 버렸다.
강승호는 SK로의 이적을 야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삼고 있다. V4에 기여한 것이 강한 자극제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올해 포스트시즌 9경기에서 홈런 3개.
강승호는 첫 경험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 V4 경험자들 - 김광현, 최정, 박정권, 김강민
◆ 2007년 한국시리즈 SK 출전 선수 명단
감독 : 김성근
코치 : 이만수, 가토 하지메, 오오타 다쿠지, 김경기, 이광길, 후쿠하라 미네오
투수 : 김원형, 채병용, 윤길현, 송은범, 케니 레이번, 마이크 로마노, 가득염, 김광현, 조웅천, 정대현, 이영욱
포수 : 박경완, 정상호
내야수 : 정경배, 이호준, 나주환, 박정권, 김동건, 정근우, 최정
외야수 : 박재홍, 김재현, 이진영, 조동화, 박재상, 김강민
▲SK엔 '가을 DNA'가 있다. 2007년 첫 우승을 차지할 때부터 김광현, 박정권, 김강민, 최정이 함께 했다. 최정과 박정권은 2007년 김재현(위쪽)과 함께 MVP의 영광도 경험했다.
우승 순간, 마지막까지 마운드를 지킨 김광현, 9회초 극적인 동점 홈런으로 연장 승부를 만들면서 모두를 자극한 최정, 포스트시즌 내내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낸 박정권과 김강민.
이들은 SK가 창단 이후 첫 정상을 차지했던 2007년 가을, 기쁨을 함께 했다. 2008년과 2010년에도 그랬다. 그리고 8년이 흘렀다. 통산 4번째 우승. 이들이 있었다. 막내에서 고참으로 최고의 무대를 만들었다.
김광현은 SK 에이스다. 2010년에 이어 올해도 우승을 확정짓는 투수가 됐다.
11월 12일 잠실구장 연장 13회말. 5-4로 승기를 잡은 SK 힐만 감독은 김광현을 마운드에 올렸다. 6차전으로 모든 승부를 마감하겠다는 의지였다. 김광현은 씩씩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자신감이 넘쳤다.
첫 타자로 맞붙은 4번 양의지에게 최고 시속 154km의 강속구를 던졌다. 3구 삼진. 백민기에 이어 박건우까지 삼자범퇴. 박건우를 다시 삼진으로 돌려 세운 뒤 양 팔을 들어 올리면서 포효했다. 3루수 최정, 포수 허도환, 1루수 로맥 등도 마운드로 달려오면서 기쁨을 나눴다.
8년 전 김광현이 떠올랐다.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짓자 함께 호흡을 맞춘 포수였던 박경완 배터리 코치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젠 나이 서른의 고참이다. 네 번째 챔피언 반지를 끼게 됐다.
최정은 힘겨웠다. 마음처럼 방망이가 돌아가지 않은 탓이었다. 헤맸다. 그래도 힐만 감독은 3번으로 내세웠다.
11월 12일 한국시리즈 6차전 9회초, SK는 3-4로 뒤졌다. 7차전을 준비해야 할 상황까지 내몰렸다. 두산은 린드블럼을 마무리로 올리면서 승부수를 던졌다. 린드블럼은 힘이 넘쳤다. 1번 김강민에 이어 2번 한동민까지 삼진으로 솎아냈다.
2사 후 3번 최정이 타석에 나갔다. 초구 스트라이크, 2구는 볼, 3구째 헛스윙. 볼카운트가 불리했지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볼 카운트 2-2에서 6구째가 들어오자 제대로 방망이를 돌렸다. 좌월 1점 홈런. 앞 타석까지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16타수 1안타(타율 0.062)로 최악의 슬럼프에 빠졌었으니 이 한방은 기적이었다. 4-4 동점.
최정은 이렇게 동점 홈런 한방으로 팀을 살렸다.
이밖에 김강민은 붙박이 1번으로 넥센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타율 4할2푼8리와 홈런 3개, 6타점으로 활약한데 이어 두산과의 한국 시리즈에서도 제 몫을 다했다. 타율은 2할4푼으로 떨어졌지만 알토란 같은 5타점과 수비 능력으로 힘을 보탰다.
박정권은 자타가 공인하는 ‘가을 사나이’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선 2-3로 뒤진 6회초 1사 2루에서 린드블럼에게 우월 2점포를 뽑아내는 등 3타점을 올리면서 활약해 데일리 MVP로 뽑혔다. 6차전에서도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해 안타를 기록하는 등 든든한 고참 역할을 해냈다.
세월이 갔다. 김강민과 박정권도 세월 앞에선 장사일 수 없다. 올 시즌 부진의 늪에 빠져 긴 2군 생활도 경험했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방망이가 뜨거웠다. SK가 우승할 때마다 그들이 있었고, 그 DNA가 살아 있었다.
이젠 모두 ‘전설’이 됐다. (이창호 전문기자 / news@sport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