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나다. 하나가 전체를 좌지우지한다. 공 1개에 웃고 울 수 있는 게임이 바로 야구다.
절체절명의 순간, 투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진다. 타자의 눈도 날카롭다. 허투루 대응할 수 없다. 투수는 위기를 넘기면 마운드에서 주먹을 불끈 쥘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곤 한다. 타자 역시 마찬가지다. 결정적인 한방으로 전세를 뒤집고, 승리를 굳히면 하늘을 날듯이 달려 나간다. 그러나 맥없이 물러서면 아쉬움에 풀이 죽기 마련이다.
‘일구일혼(一球一魂)’, 마무리 투수 뿐 아니라 중간 투수들도 모두 주문처럼 읊조리고,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야구 격언이다.
공 1개만 던지고 승리를 따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행운은 좀체 찾아오지 않는다. 선발 투수는 최소 5이닝을 채워야 승리 요건을 갖출 수 있으니 아무리 적어도 50~60개 이상의 공을 던져야 한다. 하지만 불펜 투수는 공 1개만 던지고도 승리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
승리투수와 패전투수의 결정 조건을 밝힌 야구규칙 10.19조 (c)항은 2명 이상의 구원투수가 출전했을 때 승리투수를 결정하는 규정이다. 이 조항의 (4)에는 ‘구원투수가 던지는 동안 리드를 잡고 그 리드가 경기 끝까지 유지되었을 경우 그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를 기록한다’고 못박아 놓았다. 이와 함께 ‘구원투수가 잠시 동안 비효과적인 투구를 하고 그 뒤에 나온 구원투수가 리드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인 투구를 하였을 경우 나중의 구원투수에게 승리투수를 기록한다’는 예외 조항도 붙였다.
‘1구=1승’은 준비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자 기쁨이다.
올 시즌은 벌써부터 타고투저의 바람이 거세다. 이런 와중에 공 1개로 승리의 행운을 잡은 투수가 탄생했다. KIA의 왼손 투수 임기준이 통산 19번째 주인공이다.
▶ KIA 왼손 투수 임기준(왼쪽)이 4월8일 광주 넥센전에서 공 1개만 던지고 프로 통산 19번째 최소 투구 승리 투수가 되는 행운을 잡았다. 임기준이 포수 김민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고 있다.
# 2018년 4월 8일 광주 KIA챔피언스 필드, 넥센-KIA전
넥센은 신재영, KIA는 팻딘을 각각 선발로 내세웠다. 5회까지 1-1로 팽팽하게 맞섰다.
KIA는 6회말 1사 후 1번 이명기가 우월 1점포를 날려 2-1로 앞서 나갔다. 그러나 리드도 잠시. 선발 팻딘이 7회초 넥센의 선두 타자 1번 이정후에게 우전 안타를 맞더니 2번 고종욱을 2루 땅볼로 처리했다. 94개의 공을 던졌다. 여유는 있었지만 벤치에선 교체 카드를 꺼냈다. 리드를 지켜내기 위해 1사 1루에서 필승 카드인 김윤동을 선택했다.
그러나 김윤동이 첫 상대인 3번 김하성과의 승부부터 흔들렸다. 볼카운트 1-2에서 4구째 던진 것이 폭투. 그 사이 1루 주자 고종욱은 2루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김윤동이 5구째를 던지자 김하성은 역전 좌월 2점포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2-3으로 뒤집혔다.
KIA 김기태 감독은 김윤동을 고집했다. 김윤동은 4번 박병호를 유격수 땅볼로 잡고, 5번 초이스에게 다시 중전 안타를 맞았다. 6번 김민성에겐 볼넷을 허용해 2사 1, 2루. 추가 실점을 걱정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렸다.
KIA 불펜에선 왼손 타자인 7번 임병욱을 대비해 왼손 투수 임기준이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김기태 감독은 교체를 결심했다. 김윤동 대신 임기준을 마운드에 올렸다.
▶ 임기준은 KIA 불펜의 귀한 왼손 투수다. 성장이 아직 진행 중인 기대주다. 임기준이 역동적인 동작으로 투구를 하고 있다.
KIA가 2-3으로 뒤진 7회초 2사 1, 2루에서 등판한 임기준은 첫 상대인 7번 임병욱에게 초구를 던졌다. 임병욱도 적극적이었다.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제대로 맞지 않았다. 땅볼이었다. 2루수 안치홍이 잡아 타자주자 임병욱을 1루에서 아웃시켰다. 더 이상의 실점은 없었다.
KIA는 7회말 다시 반격에 나섰다. 넥센 장정석 감독도 3-2로 역전하자 선발 신재영을 내리고 승부수를 던졌다. 7회말 첫 타자가 왼손인 4번 최형우임을 감안해 왼손 투수 김성민을 교체 카드로 썼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최형우가 중전안타로 출루했다.
넥센 불펜이 바빠졌다. 5번 안치홍의 타석부터 다시 김성민 대신 오른손 필승조인 이보근을 투입했다. 안치홍은 중견수 플라이 아웃.
그러나 KIA는 6번 서동욱이 좌익선상으로 적시타를 날려 1사 1, 2루의 기회를 잡았다. 득점은 쉽지 않았다. 7번 최원준은 2루 땅볼을 날려 1루 주자 서동욱이 2루에서 포스아웃됐다. 그 사이는 2루주자 최형우는 3루까지 진루했다. 2사 1, 3루.
KIA는 간절했다. 8번인 포수 김민식을 빼고 대타 나지완을 내세웠다. 나지완이 벤치의 바람에 부응했다. 1루수와 2루수 사이를 운 좋게 빠져 나가는 동점 우전적시타를 날렸다. 3루주자 최형우가 홈을 밟아 3-3 동점을 만들었고, 1루주자 최원준은 3루까지 내달렸다. 임무를 완수한 나지완은 대주자 황윤호로 교체했다.
넥센 벤치가 이보근을 고집한 것이 KIA에겐 행운이었을까. 9번 김선빈이 짜릿한 역전 우전 안타까지 날렸다. KIA가 4-3으로 재역전했다. 넥센은 1번 이명기의 타석 때 이보근의 다음 투수로 김상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KIA의 세 번째 투수였던 임기준은 임병욱에게 딱 공 1개를 던진 뒤 이닝 교체로 벤치로 물러났지만 시나브로 승리투수의 첫째 조건을 갖췄다. 남은 조건은 KIA가 8회와 9회까지 계속 리드를 지켜내면서 승리하는 것이다.
KIA는 8회초부터 임기준 대신 베테랑 임창용을 승리 지킴이로 투입했다. 그리고 9회초 다시 임창용 대신 마무리 김세현을 올려 4-3 승리를 지켰다.
이날 승리투수는 임기준, 공식기록은 0.1이닝 동안 1명의 타자를 상대해 투구수 1개, 무실점. 임기준이 시즌 첫 승을 신고했다. 그리고 임창용은 홀드, 김세현은 세이브를 각각 기록했다.
‘특급 마무리’ 구대성과 조용준을 아시나요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지난 시즌까지 35년 동안 공 1개만 던지고 승리투수가 된 경우는 총 18번. 18명의 ‘행운의 사나이’들이 야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행운의 여신은 한 명이 두 번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공 1개만 던지고 승리를 따내는 일은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동료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타자들은 뒤지던 게임을 뒤집어 리드를 이어가야 하고, 구원 투수들은 리드를 지키면서 승리를 굳혀야 하기 때문이다.
1982년 출범한 KBL리그에서 공 1개만 던지고 승리를 따낸 첫 주인공은 1990년에 탄생했다. 롯데의 잠수함 투수 김청수가 그 해 7월25일 마산구장에서 열린 빙그레전 때 중간에 투입된 공 1개만 던지고 승리를 올리는 행운을 잡았다.
▶ 조용준은 '현대 명가'를 일구는데 힘을 보탠 구원전문투수였다. 작은 체구에서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주무기 삼아 든든한 승리 지킴이 역할을 해냈다. 오른쪽 사진은 현재 SK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박경완과 배터리를 이뤄 팀 승리를 지켜냈을 때의 모습이다.
최소 투구 승리는 주로 중간에 투입되는 투수들의 몫이다. 그러나 왕왕 특급 소방수들에게도 이런 행운이 찾아오곤 한다. 지금 사라진 ‘현대 왕조’를 만드는데 큰 힘을 보탰던 마무리 투수 조용준, 빙그레로 입단해 한화에서 일본 오릭스를 거쳐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에서도 두루 활약했던 구대성도 최소 투구 승리투수로 이름을 올렸다.
작은 체구에도 정확한 제구력과 예리한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던 조용준은 2004년 10월4일 수원구장에서 열린 KIA전에서 공 1개만 던지고 승리투수가 됐다.
▶ 구대성은 전천후였다. 선발이면 선발, 마무리면 마무리. 팀이 원하는 역할을 언제든지 소화할 수 있는 뛰어난 구위와 운영 능력을 지녔다. 구대성은 일본과 메이저리그까지 거칠 만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투수였다. 열정도 대단하다. 마흔이 넘도록 호주에서 현역 투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오른쪽 사진은 2012년 부산사직구장에서 열린 아시아시리즈에 호주 선발팀으로 출전해 투구하는 모습이다.
구대성은 2006년 빙그레로 유턴한 첫 시즌을 맞아 9월18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롯데전에 나가 공 1개만 던지고 승리의 행운을 잡았다. 구대성은 그 해 특급 마무리로서 59게임에 나가 3승4패 37세이브와 평균자책점 1.82를 기록했다. 고졸 새내기 괴물 투수로 떠오른 류현진의 승리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확실한 ‘뒷문지기’였다.
구대성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간 대표적인 투수다. 1993년부터 2010년까지 국내 프로야구에서 통산 13시즌 동안 569경기에 나가 67승71패 214세이브와 평균자책점 2.85를 기록했다.
구대성은 마흔 살을 눈앞에 둔 2010년 한화에서 은퇴한 뒤 호주로 떠나 쉼 없는 ‘야구 열정’을 보였다. 2014년까지 시드니 블루삭스에서 투수로 활동할 정도였다.
행운은 그냥 오지 않는다. ‘공 하나의 기쁨’처럼 준비하고 노력한 자에게만 따라 다니는 것은 아닐까. (이창호 전문기자/news@isport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