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재구성] 이종범에서 박병호까지, 유턴이 ‘축복’이다

기사입력 [2018-01-26 01:28]

“홈런으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돌아온 박뱅’ 박병호가 1월 9일 인천공항에서 귀국 소감을 밝혔다.

 

“나의 기록을 뛰어 넘어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영원한 국민타자’ 이승엽이 1월 16일 KBO 홍보대사로서 첫 공식 행사에 나섰다. 이날 신라호텔에서 열린 신한은행과의 타이틀 스폰서 조인식에 참석, 박병호 등 국내 복귀에 ‘유턴파’들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했다.

 

박병호의 귀국으로 황재균, 김현수까지 KBO를 거쳐 해외로 진출했던 선수들의 유턴이 마무리됐다. 저마다 메이저리그에 대한 아쉬움을 접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또 다른 도전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절정의 기량으로 최고 성적을 만들어낸 뒤 바다를 건넌 그들. 더 큰 무대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느라 숱한 시련도 겪었다. 모두 한껏 성숙한 모습으로 국내 팬들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KBO리그 출신의 선배 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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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박병호, 김현수, 황재균(왼쪽부터)이 돌아왔다. 부와 명예를 지켜내려면 이에 걸맞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 먼저 유턴한 선배들의 본보기처럼 올 시즌 흥행을 이끌어가면서 연착륙하길 기대하고 있다.  

 

‘선배 세대’의 연착륙, 후배들에게 본보기

  

‘금의환향이냐, 실패자의 복귀냐.’

유턴파들은 과연 올 시즌 어떤 성적을 낼 수 있을까.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의 경험이 얼마나 긍정적인 성장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공백 기간 동안 변화한 국내 야구 환경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역대 유턴 타자들의 해외 진출 전후의 성적을 비교하면 올 시즌 이들의 모습을 미리 점쳐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KBO를 거쳐 일본이나 미국에 진출한 타자들은 모두 7명. 1998년 해태 이종범이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면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4년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에 진출한 이승엽은 2011년까지 8시즌 동안 활약한 뒤 2012년 삼성으로 돌아와 ‘최장수 해외파’로 야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종범, 이승엽, 김태균, 이대호 등은 한결같이 ‘3할 타자’로 알차게 복귀 신고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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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일본에선 불운 딛고 KIA에서 명예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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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의 일본 생활은 길지 않았다. 부상 탓에 제대로 활약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2001년 다시 KIA 유니폼을 입고 '야구 천재'의 명성을 되찾았다. 

 

이종범은 팔꿈치 부상의 여파로 2001년 시즌 중간 돌아왔다. 하지만 날카로운 스윙을 여전했다. 그 해 주니치 유니폼을 입고 시즌을 시작했지만 고작 8경기 밖에 나가지 못했고, 성적도 형편없었다. 타율 1할5푼4리. 홈런과 타점, 도루는 모두 하나도 없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딸 수 있다던데. 경기에 나가야 뭔가 해볼 텐데 좀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냉정했다. 결국 이종범은 KIA 타이거즈로의 복귀를 결정했다.

이종범은 새롭게 KIA 유니폼을 입자 물 만난 고기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친정 팀으로 복귀한 뒤 45경기에 나가 타율 3할4푼과 11홈런, 37타점을 기록했다. 7개의 도루까지 기록하면서 ‘바람의 아들’은 건재함을 보여줬다.

이종범은 일본의 ‘현미경 야구’ 탓에 애를 먹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맞춤형 피칭으로 타자를 공략하는데 혀를 내두르곤 했다. 일본 투수들의 제구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 투수들은 이종범이 타석에 서면 철저하게 약점을 파고들었다. 몸쪽에 바짝 붙는 공을 던져 기를 꺾으려 했다. 1998년 6월23일 한신과의 경기에선 상대 투수 가와지리 데쓰로의 공을 왼쪽 팔꿈치에 맞아 뼈가 부러졌다. 일본 데뷔 첫 해 겨우 67경기 밖에 나가지 못했다. 이종범은 일본야구의 적응하느라 탈모까지 생겼다. ‘야구천재’, ‘한국의 이치로’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종범은 일본 진출 직전인 1997년 최고의 해를 보냈다. 125경기에 나가 타율 3할2푼4리와 홈런 30개, 타점 74개, 득점 112개, 도루 64개를 기록했다. 득점과 도루 1위를 차지했다.

이종범은 ‘타자 해외진출 1호’로서 일본에서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KIA로 돌아와 이름에 걸맞는 활약을 이어갔다.

  

‘성공한 유턴파’ 이승엽, 위대한 기록으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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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은 이제 KBO리그의 '영원한 전설'로 남았다. 2012년 8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와 또 다른 금자탑을 쌓았다. 이제 현역 유니폼을 벗고 KBO 홍보위원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승엽은 2003년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131경기에 나가 타율 3할1리와 홈런 56개, 144 타점, 115득점을 올렸다. 3년 연속 홈런왕을 완성했다. 2001년 39개, 2002년 47개로 연거푸 홈런 1위에 오른데 이어 2003년에는 56개로 아시아 최다 기록을 세웠다. 타점과 득점도 모두 1위였다.

이승엽은 국내에선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었다. 꿈을 찾아 나섰다.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와 연봉 2억 엔에 계약했다.

이승엽에게도 일본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지바 롯데의 4번 타자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성적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100경기에 나가 타율 2할4푼, 홈런 14개 50타점을 올린 것이 전부였다. 초라한 성적표였다. 그러나 이승엽은 포기하지 않았다. 시범경기에서 극심한 부진을 보인 탓에 2군으로 떨어졌지만 이를 악물었다. 다시 1군에 올라와 117경기에 나가 타율 2할6푼과 홈런 30개, 82타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지바 롯데의 재팬 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이승엽은 2년 동안의 지바 롯데에서 지낸 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5년,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1년 등 모두 8시즌을 일본에서 보낸 뒤 2012년 삼성으로 돌아왔다.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었던 오릭스에서 122경기에 나갔지만 타율은 2할1리에 그쳤고, 홈런도 15개 밖에 때리지 못했다.

이승엽은 친정팀에 돌아와 다시 확실하게 존재감을 되찾았다. 삼성이 2011년에 이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복귀 첫 해에는 한국시리즈 MVP의 영광까지 안았다.

이승엽은 ‘성공한 유턴파’의 본보기다. 2017시즌에 앞서 은퇴를 예고했고, 숱한 불명의 기록을 남긴 채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이젠 KBO 홍보대사로서 제2의 야구 인생을 걷고 있다.

  

‘김치 태균 버거’까지 탄생, 짧고 아쉬웠던 일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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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균은 지바 롯데와의 계약 기간을 모두 채우지 않고 돌아왔다. 그러나 한화는 김태균을 최고 선수로 예우했다.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팀의 중심을 잡아주길 원했다. 김태균이 대전구장 1루 불펜에서 스윙 훈련을 하고 있다.(위쪽) 아래 사진은 김태균이 복귀 첫 해였던 2012년 대전구장 더그아웃에서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류현진을 양쪽 주먹을 마주치며 격려하는 모습.

 

김태균의 일본 생활은 짧았다. 2년을 모두 채우지 않고 돌아왔다. 아쉬웠다. 성적 부진과 지진 공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2011년 도중 31게임만 뛴 뒤 계약을 해지하고 한화로 유턴했다.

김태균은 2009년 시즌을 95게임에 나가 타율 3할3푼과 홈런 19개, 62타점을 올리면서 마무리했다. 그리고 FA자격을 얻자 11월13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했다. 최장 계약기간 3년에 총 연봉 7억엔을 받는 조건이었다. 등번호는 한화 때 사용하던 52번을 그래도 쓰기로 했다.

일본 롯데리아는 김태균의 활약을 기대하면서 ‘김치 태균 버거’라는 신제품 햄버거를 출시했다. 홈 구장인 지바 마린 스타디움의 롯데리아에서 김태균이 홈런을 치면 등번호와 같은 52개를 50엔으로 한정 판매할 정도였다. 연타석 홈런을 친 날엔 준비한 ‘김치 태균 버거’가 떨어지자 부랴 부랴 ‘치즈 버거’를 대체 할인 상품으로 판매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김태균은 일본 진출 첫 해 올스타 투표에서 퍼시픽리그 1루수 최다 득표를 얻은데 이어 지바 롯데의 재팬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김태균은 2010년 지바 롯데에서 141게임에 나가 타율 2할6푼8리와 홈런 21개, 92타점을 기록했지만 2011년 내리막을 걸었다. 결국 그 해 여름 귀국을 결정했다.

김태균은 한화로 돌아오면서 역대 최고 연봉인 15억원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대호는 일본 찍고, 미국 거쳐 부산으로 금의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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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는 KBO리그 출신 타자로서 일본 야구와 메이저리그를 모두 거친 유일한 선수다. 타고난 타격 감각과 재능으로 일본과 미국에서 모두 제 몫을 다하면서 이름값을 했다. 롯데 팬들의 뜨거운 성원 속에 돌아왔다. 이제 남은 과제는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것이다.

 

이대호는 화려하게 돌아왔다. 팬들의 성원이 대단했다.

이대호는 한국 프로야구를 거쳐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다가 메이저리그에서 뛰다 컴백한 유일한 타자다. ‘야구 삼국지’를 만들었다. 커다란 덩치지만 부드러움을 겸비했기에 파워와 기교를 두루 갖춘 스윙을 할 수 있었다. 아주 느린 발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점을 바탕으로 한국, 일본, 미국에서 당당하게 뛸 수 있었다.

이대호는 KBO리그에 연착륙했다. 2016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시즌을 끝낸 뒤 롯데 복귀를 결정했고, 2017년 당당한 모습으로 팬 앞에 섰다. 2017시즌 142경기에 나가 타율 3할2푼과 홈런 34개, 111타점, 73득점을 올렸다. 계약 기간 4년, 총액 150억원으로 역대 FA 최고액으로 복귀한 것에 대해 나름대로 보답한 셈이다.

이대호는 2011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133경기에서 176개의 안타로 타율 3할5푼7리, 홈런 27개, 타점 113개, 득점 76개를 기록했다. 출루율 4할3푼3리. 타격 1위, 최다안타 1위, 출루율 1위를 차지했다.

2010년 127게임에서 174개의 안타로 타율 3할6푼4리, 출루율 4할4푼4리, 장타율 6할6푼7리를 만들면서 홈런 44개, 133타점, 99득점을 곁들여 타격 7관왕에 올랐던 위용을 다시금 이어갔다. 도루를 제외한 공격 전 부문에서 최고임을 보여줬다. 국내에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이대호도 이종범, 이승엽이 그랬던 것처럼 현해탄을 건넜다. 오릭스 버펄로스의 부름을 받았다. 2년간 총 7억6000만엔을 받는 조건이었다. 한화로 100억원이 훌쩍 넘는다. 계약금 2억엔, 연봉 2억5000만엔에다 년간 인센티브 3000만엔.

오릭스에서 중심타자 몫을 다했다. 첫 해였던 2012년 144경기에서 150안타로 타율 2할8푼6리, 24홈런, 91타점, 54득점을 기록했다.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 사상 첫 퍼시픽리그 타점왕을 차지했고, 전경기 출전과 함께 1루수 부문 베스트9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이대호는 오릭스에서의 인상적인 활약 덕에 2014년엔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한다. 2년 동안 총 9억엔, 3년째는 재계약 선택권 조건에 사인했다.

소프트뱅크는 이대호를 영입한 2014년 퍼시픽리그 우승에 이어 창단 후 첫 재팬 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줬다. 이대호는 2015년에도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이끌었고, 재팬 시리즈에선 홈런 2개 등으로 맹활약하며 우승에 기여해 한국인 최초로 MVP에 선정됐다. 소프트뱅크에서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이대호는 소프트뱅크의 잔류 요청을 완곡하게 거부하고 2016년 꿈의 무대인 빅리그에 도전한다.

시애틀 매리너스는 선뜻 메이저리거로서 계약하지 않았다. 조건이 붙었다. 느린 발이 발목을 잡았다. 시애틀엔 장타력을 지닌 주전 1루수 애담 린드까지 버티고 있었다. 시애틀은 스프링캠프 초청권과 1년 연봉 400만 달러의 마이너리그 계약을 제안했다. 이대호는 자존심을 꺾고 이를 받아들였다. 실력으로 25인 로스터에 들어가겠다는 각오였다.

결국 이대호는 시범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경쟁자를 따돌리고 빅리그에 입성했다. 애담 린드의 백업 1루수인 탓에 출전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플래툰 시스템의 악조건 속에서 104경기에 나가 타율 2할5푼3리와 홈런 14개, 49타점을 기록했다.

이대호는 부와 명예를 모두 얻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1992년 이후 무려 25년이나 잡아보지 못한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

 

박병호 김현수 황재균의 동시 유턴, ‘흥행+성적’ 쌍끌이 희망 행진

 

박병호는 친정 넥센으로 돌아왔다. 김현수는 두산을 떠나 ‘한 지붕 두 가족’인 LG에 새 둥지를 틀었다. 황재균은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고 KT 위즈로 옮겼다.

박병호는 벌써부터 SK 최정과 화끈한 홈런왕 경쟁에 예고했다. 김현수는 공수에서 중심 선수로서 새로운 LG 팬들을 사로잡아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황재균은 핫코너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중심 타선까지 이끌어가야 한다.

‘유턴 삼형제’는 이제 빅리그에 대한 환상을 모두 버렸다. 단맛 쓴맛을 모두 경험했으니 좀더 성숙한 모습으로 팬 앞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실력을 쌓고, 해외로 진출해 명성을 쌓고 친정팀으로 복귀해 이름에 걸 맞는 활약을 펼쳤던 선배들처럼 연착륙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들은 정운찬 커미셔너가 열어갈 ‘관중 900만명 시대’를 앞에서 이끌어야 한다. 빅리그에 진출하기에 앞서 보여줬던 성적 이상을 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유턴 삼형제’의 희망 행진은 이미 시작됐다. (이창호 전문기자/news@isport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