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산책]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들의 명(明)과 암(暗)

기사입력 [2018-11-2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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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대구상고 시절 이영민 타격상 수상 후 삼성에 입단한 이만수 선수의 모습.

  

야구팬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영민 타격상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영민 선생은 1905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육상, 축구 그리고 야구선수로 활약한 대한민국의 훌륭한 체육인 중 한 분이다.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하는 그는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스카웃되어 재학 중 전조선 축구대회에서 활약하였고, 경성축구단의 일원으로 1935년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의 주역이기도 하였으며 조선축구협회 창설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업적이 있다. 또한 경평축구선수로 육상대회에도 참가하여 400m 부문에서 546의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야구선수로서는 배재학당 졸업이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로 진학한 후 야구에 집중하였다. 1928년 경성 운동장에서 열린 경성의학전문대(현 서울대 의과대학)와의 야구 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홈런을 친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후 일본 야구 대표로 선발되어 일본 선수들에게 기량으로 결코 뒤쳐지지 않은 실력으로 당시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현역 은퇴 후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 1954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아시아 야구 연맹의 대한민국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야구 발전에 많은 초석을 다지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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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경동고 백인천 선수는 이영민 타격상 2회 수상 후 일본으로 건너가 맹활약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대한야구협회에서는 이영민 선생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58년 이영민 타격상을 제정하여 고교 야구 선수들 중에서 매년 9개의 전국 고교 야구 대회(황금사자기,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무등기, 대붕기, 화랑대기, 미추홀기, 전국체전) 5개 대회 이상, 15경기, 60타석 이상을 기록한 선수들 중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상을 수여해 왔다. 1958년 경남고 김동주 선수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59(2000년에만 수상자 없음)의 수상자가 배출되었고, 그 중 야구팬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 선수들이 있다. 1959년 경동고 백인천 선수는 2회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면서 1975년 일본 퍼시픽리그 수위타자와 올스타 경기 4회 출전 등의 업적을 남기고, 40세 때인 1982년 감독 겸 선수로 MBC청룡에서 기록한 .412(80경기)의 타율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을 만큼 깨지기 어려운 최고 타율을 기록하였다. 1965년에 수상한 중앙고 이광환 선수는 비록 프로무대에서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감독으로서 고교, 대학, 프로팀 등에서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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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천고의 간판 김경기 선수의 현대 유니콘스시절 모습.

  

이후 1977년에는 대구상고 이만수 선수가 수상하면서 82KBO 원년 멤버로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하여 KBO 1호 홈런과 안타의 주인공이 되었고, 1984년에는 타격, 홈런, 타점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의 한국 프로야구의 한 획을 그은 명포수이자 타격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85년 인천고의 김경기 선수는 서울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고, 연고팀인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하여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야구 집안이었던 김경기 선수의 아버지는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 감독이었던 김진영 감독이었고, 심판으로 오랜 동안 활약을 해온 김풍기 심판이 사촌 형이다. 이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선수들은 대부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야구를 그만 두었다. 1991년 수상자 신일고 강혁 선수는 대학과 프로에 이중 등록문제로 영구제명 되었지만, 아시안게임 우승의 공로로 철회되어 병역면제와 더불어 프로선수의 자격을 회복하였지만 결국 뚜렷한 활약없이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또한 1997년과 982년 연속 유일한 수상자였던 경남고의 신민기 선수 역시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였으나 별다른 활약없이 부진을 보였고, 병역비리 사건에도 연루되어 구속된 후 복귀한 다음에는 지도자로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좋은 재능의 고교 야구선수가 KBO 리그 출범 이후 프로무대에서는 큰 활약을 한 선수가 드물어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라는 말까지 돌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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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선수는 2004년 유신고 시절 수상자였고, SK 거포로 자리매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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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신일고 시절 수상자 김현수 선수는 올해 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 프로무대에서 활약중인 선수들이 보다 많이 배출되고 있다. 2004년 유신고 최정 선수는 SK 와이번스 소속으로 리그 최고의 거포로 자리매김하였고, 2005년 신일고 김현수 선수는 MLB에도 진출하여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현재는 LG트윈스에서 활약 중이다. 2009년 신일고 하주석 선수는 조금 늦게 활약을 하였지만 현재 한화 이글스에서 주전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2011년 휘문고 박민우 선수는 국가대표로 발탁될 정도의 실력으로 NC 다이너스의 주전 내야수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2014년 장충고 송성문 선수는 넥센 히어로즈에서 최근 김민성 선수의 백업으로 출전하여 타격상 출신임을 과시하듯 연일 안타와 홈런으로 팀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2015년 서울고 최원준 선수는 KIA 타이거즈에서 2016년 동산고 김혜성 선수는 넥센 히어로즈에서 각각 자신들의 장기인 타격을 마음껏 뽐내며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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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장충고 시절 타격상 수상자 송성문 선수의 넥센 히어로즈 활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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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동산고 시절 수상자 김혜성 선수의 모습.

  

혹자는 이영민 타격상의 기준이 비교적 낮아 적은 데이터로 정확한 실력을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크게 인정을 하지 않은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타격에 재능과 노력이 합쳐진 결실로서 이영민 타격상은 그 가치가 매우 커 보인다. 특히 성인무대를 앞두고 있는 고교 야구선수들에게는 마치 프로무대의 신인상처럼 전국에서 가장 타격을 잘하는 그리고 성장가능성이 무한한 잣대로서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고교야구와 프로야구의 환경은 완전히 다르다.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 지속적인 타격감을 선보이려면 우선 선수의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겠지만, 선수를 둘러싼 구단의 노력 역시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낯설고 수준이 높은 프로무대에 올라와 타격 슬럼프를 겪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과정일 수 있는데, 처음부터 잘 적응하여 좋은 성적을 바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한다. 천부적인 타격에 재능이 있는 선수들인 만큼 구단에서 미래에 주축이 될 선수로서 특별 관리를 해 준다면 언젠가 팀에 큰 보탬이 되는 선수이자 나라의 대표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동안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 60여명의 선수들 중 성공적으로 프로무대를 거쳐 활약 중이거나 활약한 선수들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바로 단기간에 너무 큰 기대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매년 배출되는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들의 프로무대에서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도 프로야구를 보다 재미있게 관람하는 묘미가 아닐까 한다. (김진국 전문기자/navyjk@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