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재구성] 윤성환 무4사구 완봉승, 빠르기보다 제구가 먼저

기사입력 [2019-05-13 13:01]

투수의 첫째 조건은 제구력이다.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지녔어도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없으면 투구라 할 수 없다.

 

제구는 단순히 스트라이크 존에 던질 수 있는 재주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투수 자신이 던지고 싶은 곳, 포수가 원하는 곳으로 공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어떻게 하든 투수의 공을 때려내겠다는 의지로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상대할 때는 더욱 어려운 것이 제구력이다.

 

스프링캠프나 불펜에서 던질 때도 쉽지 않았는데 실전에서 타자가 서 있는 상황에서 마음먹은 대로 공을 던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볼넷이나 몸에 맞는 공을 단 한 개도 내주지 않고 완성하는 ‘무4사구 완봉승’. 쉽지 않기에 투수에겐 아주 영광스런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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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의 베테랑 투수 윤성환이 지난 8일 대구 NC전에서 역투하고 있다. 윤성환은 이날 개인 통산 2번째 무4사구 완봉승을 거뒀다. 좋은 투수에겐 제구가 빠르기보다 더 중요함을 일깨웠다. 

 

삼성의 베테랑 투수 윤성환(38)이 값진 무4사구 완봉승을 거뒀다. 지난 8일 대구 챔피언스 파크에서 열린 NC전에서 환상적인 제구력을 앞세워 개인 통산 2번째 무4사구 완봉승을 기록했다. 한화 송진우가 39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2005년 9월 8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SK를 상대로 무4사구 완봉승을 올린 데 이어 역대 두 번째 최고령 투수로 등록했다.

 

# 2019년 5월 8일 대구 라이온스 파크 - 부활 알린 99구

 

완벽했다. 깔끔했다. 자로 잰 듯한 제구가 일품이었다. 마치 타자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어낸 뒤 공을 던지는 것처럼 절묘한 볼 배합도 빛났다.

 

기다리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공격적으로 승부했다. 삼성 선발 윤성환이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주면서 마운드를 지배했다. 삼성은 NC를 2-0으로 물리쳤다.

 

윤성환은 개인 통산 2번째 무4사구 완봉승이자 KBO리그 역대 129호 무4사구 완봉승. NC 선발 루친스키도 비록 완투패를 기록했지만 윤성환과 함께 명품 투수전을 만들었다. 오후 6시 29분에 시작한 경기는 8시29분, 딱 2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이날 삼성은 0-0이던 1회말 2사후 3번 구자욱이 좌월 2루타로 나간 뒤 4번 러프가 시즌 5호째 우월 2점포를 날려 승기를 잡았다.

 

윤성환이 1회말 2득점을 끝까지 지켜내는데 앞장섰다. 9이닝 동안 총 99개의 공으로 28명의 타자를 상대해 2안타만 내줬다. 삼진 4개를 뽑아냈고, 4사구는 단 1개로 내주지 않았다. 땅볼로 9차례, 플라이볼로 11차례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또 2차례 직선타를 야수들의 호수비로 막아냈다.

 

이날 윤성환의 최고 구속은 시속 134km. 빠르기만 보면 난타를 당할 수 있었지만 기가 막힌 제구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빠른 승부로 타격 타이밍을 흐트러뜨린 것도 효과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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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투수 윤성환(왼쪽)이 지난 8일 대구 NC전에서 6회 이닝이 바뀔 때 좋은 수비로 9번 김성욱의 타구를 잡아낸 중견수 박해민을 맞아주면서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야수들은 호수비로 윤성환의 역투를 도왔다. 중견수 박해민은 6회초 2사 후 9번 김성욱의 깊은 타구를 점프 캐치로 잡아냈고, 2루수 김상수는 4회초 2사 후 3번 박민우의 강한 직선타구를 잡아내는 등 까다로운 타구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했다.

 

2-0으로 앞선 5회초 선두타자 4번 양의지에게 좌전안타를 맞았지만 도루자로 잡아 위기를 넘겼고, 8회초 2사 후 6번 박석민에게 우전안타를 내줬지만 다음타자 7번 손시헌을 2루 플라이로 막아내면서 실점 위기를 넘겼다.

 

윤성환은 2015년 9월 5일 마산구장에서 열린 NC전에 선발로 나가 생애 첫 무4사구 완봉승을 올린 뒤 5년 만이다. 당시엔 비로 경기가 중단된 탓에 5회까지만 던지고도 무4사구 완봉승의 행운을 맛봤다.

 

올 시즌 2승째를 완봉승으로 장식한 윤성환은 많은 축하를 받았다. 대구 라이온즈파크 로비에는 ‘99구 완봉승을 축하합니다. 삼성의 오른팔'이라는 문구가 적힌 대형 화환이 놓였다. 삼성 팬들은 ‘윤성환이 매덕스했다’며 메이저리그의 명투수 그렉 매덕스에 빗대 축하 인사를 남겼다.

 

# ‘무4사구 완봉 역대 1위’ 선동열부터 정민철, 이상군, 한용덕까지 환상 제구

 

1982년 출범한 KBO리그에서 지난해까지 기록된 무4사구 완봉승은 총 128호.

 

1982년 5월 26일 삼성의 왼손투수 권영호가 대구 시민구장에서 롯데를 상대로 첫 무4사구 완봉승을 올린 뒤 2017년 9월 15일 SK 외국인투수 다이아몬드가 잠실 두산전에서 무4사구 완봉승을 올릴 때까지 숱한 투수들의 영광의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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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태 선동열은 '국보 투수'다. 빠른 공과 정교한 제구력을 지녀 최고 투수로서 빛나는 기록을 남겼다. 선동열은 개인 통산 9차례나 무4사구 완봉승을 거둘 만큼 뛰어난 제구력을 보였다. 

 

그 중 가장 많은 무4사구 완봉승을 올린 투수는 ‘국보 투수’ 선동열이었다. 해태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선동열은 총 9차례나 무4사구 완봉승을 기록했다.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공과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주무기 삼아 뛰어난 제구력을 보인 결과다.

 

선동열은 1986년에만 4차례 무4사구 완봉승을 올려 최고 투수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였다.

 

선동열과 함께 프로야구 초창기를 이끌었던 김시진과 최동원은 딱 한 번씩만 무4사구 완봉승을 거뒀다. 김시진은 1983년 7월 9일 대구 시민구장에서 열린 삼미전에서 8회 강우콜드게임 무4사구 완봉승을 기록했다. 최동원은 1985년 9월 18일 부산 구덕구장에서 삼성을 상대로 생애 첫 무4사구 완봉승을 남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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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에 이어 역대 특급 투수 중 2번째 무4사구 완봉승을 많이 기록한 선수는 한화 정민철이다. 한화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기 전까지 총 6차례나 무4사구 완봉승을 올렸다. 정민철이 빙그레 시절 이상군과 한용덕에 이어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들의 계보를 이어갔다.

 

‘고무팔’, ‘컴퓨터 제구’라는 별명을 얻었던 이상군은 1986년 6월 11일 잠실 OB전을 시작으로 1989년 6월 29일 잠실 MBC전까지 4차례나 무4사구 완봉승을 만들었다. 한용덕 역시 4번의 무4사구 완봉승을 올리면서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임을 입증했다. 특히 1986년 시즌 최다인 7번이나 무4사구 완투 게임을 했고, 1986년 6월 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OB와의 더블헤더 2차전부터 7월 8일 잠실 OB전까지 49이닝 연속 무4사구를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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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는 제구력이 뛰어난 투수들이 많았다. 이상군, 한용덕, 정민철(왼쪽부터)이 정확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무4사구 완봉승을 이끌어낸 주인공들이다. 

 

빠른 공은 투수에게 가장 위력적인 무기다. 그러나 제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제구력은 그 자체만으로 투수의 존재 가치를 높일 수 있다.

 

KBO리그에선 ‘불혹’을 눈앞에 둔 윤성환이, 빅리그에선 다저스의 에이스로 발돋움하고 있는 류현진이 귀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창호 전문기자/news@isport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