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자의 향기’(1998년, 장현수 감독)는 청순한 이미지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여배우 명세빈의 데뷔작입니다. 벌써 햇수로 20년 이상 훌쩍 지나간 일입니다만 데뷔 당시 명세빈은 1천5백대 1의 경쟁을 뚫고 여주인공에 발탁됐다는 뉴스로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이때 명세빈이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데는 사실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향기’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기 이전에 이미 크라운제과의 초코하임 CF에 등장해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코하임 CF에서 그녀는 백혈병에 걸린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 긴 생머리를 삭발하는 모습을 연기해냈는데, 단발성에 불과한 CF 한 편 출연을 위해 과감하게 삭발한 연기투혼이 관계자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던 것이지요.
1천500대 1의 경쟁을 뚫고 '남자의 향기' 여주인공으로 선발된 명세빈.
당시 ‘남자의 향기’의 제작사(두인컴)와 장현수 감독은 남자 주인공으로 일찌감치 김승우를 캐스팅해놓은 상황에서 순수한 이미지의 여주인공을 공개 오디션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온 매스컴에 알리면서 대대적으로 공모를 진행했습니다.
하병무 작가의 원작소설 ‘남자의 향기’가 200만부 이상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였던 터라 영화계 안팎에서는 여주인공 신은혜 역에 대한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기자들이 소속된 매니지먼트기획사마다 자사의 여배우들을 앞세워 공개 오디션에 도전했지요. 말하자면 ‘남자의 향기’의 여주인공 공개 오디션에는 신인배우 뿐만 아니라 기성배우들까지도 참가하며 열띤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최종 오디션은 강원도의 어느 리조트에서 펼쳐졌는데, 많은 매체들이 몰려와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필자도 당시 최종 공개 오디션의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영화 ‘남자의 향기’의 여주인공 신은혜의 캐릭터를 참신하게 연기해낼 적임자를 가려내기 위해 ‘매의 눈’으로 후보자들을 면밀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디션 과정의 경쟁이 뜨거웠던 것과는 달리 심사 결과는 의외로 쉽게 도출됐습니다. 많은 후보들 가운데 명세빈에게 압도적으로 표가 몰렸던 겁니다. 장현수 감독 등 당시 심사에 참여했던 심사위원들 거의 대부분이 명세빈을 여주인공으로 결정하자는 데 동의했지요.
이날 심사위원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어필했던 것은 공개 오디션에 나선 명세빈이 “여주인공 신은혜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덧니를 발치했다”고 밝힌 점이었습니다. 웃을 때 드러나는 매력 포인트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덧니를 과감하게 발치했다는 사실에 심사위원들은 단박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초코하임 CF로 높은 가점을 받을 상황이었는데, 덧니 발치까지 하고 오디션장에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심사는 하나마나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남자의 향기' 제작진은 일찌감치 남자주인공으로 김승우를 캐스팅해놓고, 여주인공을 대대적인 공모방식으로 선발했다.
삭발과 발치까지 감행하는 연기 투혼, 그리고 이런 투혼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다소곳한 분위기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배어나오는 이미지 등 심사과정의 토론 자체가 무의미해질 만한 ‘압도적인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명세빈은 ‘남자의 향기’의 여주인공 은혜 역으로 결정되는 동시에 공개 오디션의 공동 주최사였던 통신사 데이콤의 전속모델로도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남자의 향기’는 원작소설과 거의 흡사한 스토리라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20여년에 이르는 원작의 이야기를 2시간 짜리 영화로 옮겨내는 과정에서 더러 개연성 부족의 문제를 드러내기는 했습니다만 남자주인공 권혁수(김승우)와 신은혜(명세빈)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는 그대로였습니다.
어린 시절 갑자기 나타난 소녀 은혜. 낯설어하는 은혜를 혁수는 마치 친동생처럼 아끼며 돌봐줍니다. 둘은 친남매 이상으로 지내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대학입시날 은혜는 동네 불량배들에게 끔찍하게 강간을 당하고 맙니다. 이 사실에 분노한 혁수는 동네 불량배들을 찾아가 처절하게 복수하고 감옥행을 택합니다.
한참 후 출감한 혁수는 은혜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중 암흑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은혜의 평범한 대학생활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서지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남매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만 나름 행복한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국회의원의 아들 철민(조민기)의 청혼으로 두 사람의 관계도 갈등의 정점을 찍습니다. 혁수는 찢어지는 가슴을 억누른 채 은혜의 손을 붙잡고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철민의 변대스런 폭력으로 얼룩진 결혼생활을 견디다 못한 은혜는 다툼도중 엉겁결에 철민의 가슴에 칼을 꽂게 됩니다. 혁수는 은혜를 피신시키고 자신이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다시는 돌아나오지 못할 감옥행을 택합니다.
은혜는 교도소 근처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수시로 혁수를 면회다닙니다. 면회하는 짧은시간이 두 사람에겐 더없이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결국 혁수는 은혜를 남겨둔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억누른 채 은혜(명세빈, 아래 사진 왼쪽)를 철민(조민기, 아래 사진 오른쪽)과 결혼시킬 수밖에 없는 혁수(김승우, 위 사진)가 착잡한 표정으로 웨딩드레스를 바라보고 있다.
전형적인 신파 스토리입니다만 원작소설도 그렇고 영화 또한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절절하게 그려내 관객들의 눈물깨나 짜냈습니다.
특히 은혜의 결혼식 장면은 지금도 여러 SNS에서 해당 영상을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영화 상영때, 멜라니 사프카의 ‘더 새디스트 씽’(The Saddest Thing)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면서 웨딩드레스 입은 은혜의 손을 붙잡고 성당으로 들어가는 혁수의 모습을 바라보던 여성관객들은 그야말로 폭포처럼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승훈의 뮤직비디오 ‘내 방식대로의 사랑’의 출연이 연기경험의 전부였던 명세빈은 신인답지 않은 안정된 연기력으로 은혜 역할을 수행해냈습니다.
영화내내 그녀는 특히 남성팬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맑고 투명한 이미지를 잘 그려냈습니다. 이 영화에서의 호연으로 그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기까지 했으니까요.
'남자의 향기'에서 감칠맛 나는 조연으로 등장했던 키다리배우 장세진(사진 위)과 김해곤(사진 아래 오른쪽).
감독데뷔작인 ‘걸어서 하늘까지’(1994년)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던 커리어로 장현수 감독도 무리없이 멜로라인을 연출했습니다. 다만 전작들(‘게임의 법칙’ ‘본 투 킬’)에서 익히 보았음직한 클리셰(Cliché- 상투적인 표현, 진부한 장면)가 지나치다는 비평가들의 냉정한 평가도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명세빈과 김승우 외에도 눈길을 끄는 배우들이 여럿 출연했습니다. 악역 전문배우로 활약하던 키다리 배우 장세진의 분투, 그리고 훗날 시나리오작가와 감독(‘연애, 참을 수 없는 그 가벼움’ ‘숙명’)으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혀온 김해곤의 열연도 인상적이었지요.
그중에서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배우가 김래원과 이요원입니다.김래원은 김승우의 아역(어린 혁수)으로, 이요원은 명세빈의 아역(어린 은혜)으로 각각 출연했습니다. 이들에게도 ‘남자의 향기’는 연기 데뷔작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크게 잘못된 게 없음에도 상업적으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베스트셀러 원작소설을 영화화할 때, 그 부담감으로 인해 기대에 못미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날 수 있다던 영화계의 속설을 입증이라도 하듯 ‘남자의 향기’는 서울 관객 15만명 정도를 모으는 데 그쳤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남자의 향기'의 카액션 촬영현장(사진 아래).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김승우(사진 위). 촬영용 모니터를 바라보는 장현수 감독(사진 가운데).
'남자의 향기'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를 위해 포즈를 취한 김승우와 명세빈(사진 위). 그리고 '남자의 향기'의 메인포스터(사진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