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강원도 정선의 카지노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어떤 카지노에서든, 여러 가지 방식의 도박게임들이 입장객들을 유혹합니다. 주사위를 룰렛 휠(Roulette wheel)에 돌리는 룰렛게임부터 동전을 투입구에 넣고 잭팟이 터지기를 기대하는 슬롯머신(Slot machine), 그런가하면 트럼프 카드를 사용하는 바카라(Baccarat)와 블랙잭(Blackjack), 그리고 홀덤포커(Holdempoker) 등의 게임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손님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지요.
이중에서도 대중적 선호도가 높은 도박게임으로 대개 블랙잭(Blackjack)을 꼽습니다. 카지노 딜러와 손님이 서로 카드의 숫자를 겨루는 게임인데, 2장 이상의 카드를 꺼내어 그 합계를 21점에 가깝도록 만들어 딜러의 점수와 승부하는 카드게임입니다.
이 블랙잭의 선호도가 높은 이유는 카지노의 수익률 산정 시스템인 ‘하우스 에지’(House edge)가 가장 낮은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하우스 에지‘란 카지노가 베팅하는 손님에 비해 유리한 정도를 일컫는 말인데, 말하자면 원래 카지노의 시스템이라는 게 베팅하는 손님에 비해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그나마 손님이 이길 확률이 다른 게임들에 비해 높다는 뜻입니다.
오죽하면 천재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카지노에서 온갖 수학적인 확률 계산을 통해 온갖 게임을 해보고난 뒤,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유일한 방법은 딜러의 칩을 훔치는 것 뿐”이라고 했겠습니까.
이 때문인지 ‘블랙잭’은 카지노의 도박게임 전체를 대표하는 단어로도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카지노에 간다고 하면 블랙잭 게임을 하러 가는 것으로 이해될 정도니까요.
1997년 추석시즌 서울 종로 3가의 단성사에서 개봉된 최민수 강수연 주연의 영화 ‘블랙잭’(정지영 감독)도 아마 관객들로 하여금 도박게임 같은 느낌을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제목을 붙였던 것 같습니다.
카지노의 도박게임과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던 영화 '블랙잭'에는 월드스타 강수연이 일찌감치 여주인공으로 내정되었다.
개봉 당시 영화 포스터에서도 ‘블랙잭=도박게임’이라는 뉘앙스를 물씬 풍겼습니다.
근육질의 상반신을 알몸으로 드러낸 남자 주인공 최민수가 슬립 차림의 여주인공 강수연을 뒤에서 끌어안은 포즈 위로 “거칠고 자극적인 게임”이란 카피를 덧입혀 관객의 시선을 붙들었습니다.
이 포스터 한 장으로 ‘블랙잭’이라는 영화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영화 홍보 전단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씌어진 “그녀를 갖기 위한,,, 그 남자를 이용하기 위한,,, 최강의 격돌”이라거나 “KING을 가진 남자와 ACE를 숨긴 여자의 위험한 상상, 위험한 섹스”라는 글귀에서도 뭔지 모를 음모가 짙게 드리워졌음을 짐작케 했습니다.
'블랙잭'의 느와르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남자 주인공 최민수는 특유의 카리스마 연기로 이름값을 해냈다.
블랙잭’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적잖은 화제를 낳았습니다.
우선 정지영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에서 영화관계자들의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그도그럴것이 정지영 감독은 ‘남부군’(1990년)과 ‘하얀전쟁’(1992년), 그리고 ‘헐리우드키드의 생애’(1994년) 등의 영화를 통해 한국현대사와 궤적을 같이 해왔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민낯을 가감없이 드러내면서 ‘시대와 역사의 담론’을 영화로 담아내던 그가 느와르라는 장르영화를 연출한다니까 의외라는 반응을 나타냈던 겁니다. 게다가 ‘블랙잭’이 에로틱 스릴러의 형식을 지녔다는 부연 설명을 듣고서는 더더욱 놀라운 표정을 지었지요.
하지만 평소 정 감독과 가깝게 지내온 영화인들은 오히려 ‘오랫만의 장르영화 회귀’라면서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정 감독은 데뷔작인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년)부터 ‘추억의 빛’(1984년) ‘거리의 악사’(1987년) ‘위기의 여자’(1987년) 등에 이르기까지 느와르나 치정스릴러 등 장르영화 연출에도 만만찮은 역량을 발휘해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90년대 한국영화계의 톱스타로 군림해온 최민수와 강수연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주인공으로 포진시켰으니 ‘블랙잭’에 대한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최고의 배우인 최민수와 강수연이 처음으로 한 영화에서 만났다는 사실 또한 ‘호재‘였습니다.
수많은 영화와 TV드라마를 출연해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작품에서 공연한 적이 없었던 최민수와 강수연이 ‘블랙잭’에서 강렬한 카리스마 대결을 펼치게 됐으니, 영화계 뿐 아니라 대중의 호기심도 덩달아 급증했습니다.
유능하지만 타락한 형사(최민수)는 치명적인 매력의 유부녀(강수연)에게 빠져 그녀의 음모대로 움직이다가, 마침내 파멸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같은 대중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당시 ‘블랙잭’의 촬영현장에는 늘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몰려와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특히 최민수와 강수연이 펼쳐낼 에로틱 무드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아내려는 사진기자들의 몸싸움은 여간 치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어느 매체에는 ‘강수연 최민수, 깊은 밤 진한 러브신- ‘블랙잭’ 촬영현장 열기 후끈‘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최민수와 강수연이 산뜻한 러브신을 공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노련하기로 소문난 정지영 감독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촬영현장의 두 배우는 프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중략)
리허설 때는 다소간 어색함이 흘렀으나 정 감독과 촬영, 조명감독 등 주요 스태프만 참여한 본 촬영에서는 두 배우 모두 매우 적극적으로 에로틱 연기를 펼쳐 정 감독이 흡족해 했다는 후문이다.(후략)“
북아프리카 모로코 로케이션을 다녀온 영화 '인샬라'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블랙잭'의 출연을 결정했던 최민수.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은 타락한 형사(최민수)가 치명적인 매력의 유부녀(강수연)에게 빠져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결국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욕망을 쫓아가는 두 남녀의 ‘위험한 게임‘은 얼핏 캐더린 터너 주연의 할리우드영화 ’보디 히트‘(1981년)를 연상케 했습니다.
최민수를 유혹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고, 마침내 파멸에 빠뜨리는 강수연의 팜므파탈 연기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디 히트’의 캐더린 터너 못지 않았습니다.
최민수도 트레이드마크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이름값을 해냈습니다. 앞서 보도된 기사처럼 강수연과 최민수의 에로틱 무드 장면도 제법 여러차례 나왔습니다.
하지만 기사에서처럼 ‘적극적으로 에로틱 연기를 펼쳤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요. 당연히 관객들은 적잖은 배신감을 느끼고, 또 안타까워(?) 했습니다.
'블랙잭'의 촬영현장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강수연과 최민수(사진 위), 그리고 정지영 감독(사진 아래, 왼쪽).
결과적으로도 ‘블랙잭’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단 강수연 최민수의 에로틱 연기에 대한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뻔한 결말의 이야기가 스릴러 영화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무려 15년전에 만들어진 ’보디 히트‘보다도 못하다는 혹평을 받기까지 했으니까요.
사실 ‘블랙잭’에 앞서 최민수는 머나먼 중동의 모로코에서 찍었던 영화 ‘인샬라’(1997년, 이민용 감독)의 예상 밖의 흥행실패에 아쉬움을 갖고 있던 차에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함께 작업했던 정지영 감독의 캐스팅 제안을 단박에 받아들였던 것이었습니다. 반전을 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는 강수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블랙잭’에 합류하기 직전에 찍은 영화 ‘지독한 사랑’(1997년, 이명세 감독)에서의 미진함을 상쇄하려던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최민수와 강수연은 둘 다 이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블랙잭’과 함께 1997년 추석시즌에 개봉되어 관객몰이에 성공한 두 한국영화 ‘접속’(장윤현 감독)과 ‘나쁜 계집- 창’(임권택 감독)의 장기상영를 부러워하며 쓸쓸하게 극장 간판을 내려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단 한 사람, ‘블랙잭’을 평생의 영화로 기억하게 된 배우가 있었습니다. 유해진입니다.
유해진의 영화데뷔작이 ‘블랙잭’이었던 겁니다.
어린 시절부터 연기자를 꿈꿨던 유해진은 서울예전(지금의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극단 목화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해오던 중 당시 ‘블랙잭’의 조감독이었던 안병기 감독(‘가위’ ‘폰’ ‘아파트’ 연출)에 의해 ‘블랙잭’에 출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블랙잭‘에서 유해진이 맡은 역할은 거친 성격의 덤프트럭 운전수였습니다. 최민수와 말다툼을 하는, 단 한 씬에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이 씬에서 욕설을 심하게 섞어 인상적으로 연기하는 모습을 본 몇몇 영화관계자들에 의해 이후의 영화출연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주유소습격사건‘(1998년)을 비롯해 ’간첩 리철진‘(2000년) ’신라의 달밤‘(2001년) ’무사‘(2001년) ’공공의 적‘(2002년) 등을 통해 명품조연배우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거지요.
유해진도 훗날 인터뷰할 때마다 ‘블랙잭’이 자신의 연기인생을 바꿔놓은 터닝포인트였다고 털어놓곤 합니다. (이창세 영화기획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오랫만에 장르영화 연출에 나선 정지영 감독이 촬영현장을 지휘하는 모습. 강수연과 최민수에게 디렉팅을 주고 있는 정 감독(사진 맨 위와 두번째 위), 카 액션에 앞서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모습(세번째, 네번째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