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연상연하 커플,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 어린 커플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지만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연상연하 커플은 무척 드물었습니다. 법률을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남자가 여자보다 몇 살이라도 많은 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지던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친구의 누나를 어린 시절부터 줄곧 사랑해온 순정남의 러브스토리를 담아낸 영화가 나와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내 짝으로 점찍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의 영화 ‘찜’(1998년, 한지승 감독)이었습니다.
영화의 기획은 ‘찜’의 제작사(황기성사단)의 황기성 사장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황 사장은 일찌감치 기획영화의 중요성을 설파해온 인물이었습니다.
연상연하 커플 컨셉으로 기획된 영화 '찜'의 남녀 주인공으로는 안재욱과 김혜수가 캐스팅되었다.
그는 한국영화 황금기를 이끌었던 故신상옥 감독(신필름)의 기획실 출신입니다. 신필름에서 영화일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무작정 신 감독을 찾아가서 “석달간 기획실에서 심부름하게 해주십시오. 월급은 필요없습니다”라고 취업요청(?)하여 신필름 기획실 직원이 되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영화계에도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그는 기획실에 출근하자마자 ‘앙케이트 설문지’를 만들어 명동이나 종로의 미장원, 빵집 등을 돌아다니며 설문조사부터 했습니다. 당시에는 라디오드라마나 신문의 연재소설 등을 영화화하는 추세였는데, 이를테면 대중이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고, 어떤 소설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설문조사를 통해 알아낸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이미 남다른 기획 감각을 나타냈던 것이었지요. 그가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영화판권 우선 리스트’를 만들어 보고하자 신 감독의 칭찬이 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지요. 그렇게 해서 석달간의 무급 기획실 직원이 한달도 안되어 정식직원으로 발령받게 되었습니다.
황 사장의 이같은 기획 감각은 ‘찜’ 이전에도 이미 여러차례 입증됐습니다. 한국영화계에 기획 영화의 기운이 막 돌기 시작하던 무렵 ‘성공시대’(1988년, 장선우 감독)나 ‘접시꽃 당신’(1988년, 박철수 감독)을 제작했으며, 기획영화의 효시처럼 일컬어지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 강우석 감독)를 비롯해 ‘닥터 봉’(1995년, 이광훈 감독) ‘고스트 맘마’(1997년, 한지승 감독) 등이 모두 그의 기획 아이디어에서 나온 영화들입니다.
당시로서는 다분히 앞서가는 트렌드였던 연상연하 커플의 컨셉을 영화화하겠다는 아이디어 역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스트 맘마’의 연출을 맡겨 감독으로 데뷔시켰던 한지승 감독과 다시한번 호흡을 맞추기로 결정했던 거지요.
한 감독은 ‘고스트 맘마’(1996년)의 성공 이후 차기 연출작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고스트 맘마’로 함께 성공의 과실을 나누었던 황 사장으로부터 연이은 연출 제안을 받으니 그로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요.
또 연상연하 커플 컨셉의 이야기에도 구미가 당겼습니다. 황 사장의 컨셉을 듣자마자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각색하겠다며 나섰지요. ‘찜’의 시나리오는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친구의 누나(김혜수)에게 술의 힘을 빌어 사랑고백을 하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하는 주인공(안재욱).
‘찜’은 캐스팅도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여기에는 한 감독의 데뷔작 ‘고스트 맘마’의 성공이 어느 정도의 후광 효과로 작용했습니다.
영화 속 친구의 누나 역할에는 김혜수, 친구의 누나를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에는 안재욱이 결정됐습니다. 특히 안재욱은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곧바로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을 만큼 ‘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습니다.
안재욱의 캐스팅은 ‘찜‘의 제작사나 한 감독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찜‘의 출연 결정 직전 방영된 MBC TV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1997년)를 통해서 안재욱은 안방극장 시청자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안재욱의 진가가 이 드라마에서는 한껏 빛을 발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안재욱은 ’강민‘이란 가수 역할을 연기했는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가창력까지 선보이면서 소녀팬들의 팬심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故최진실과의 케미 또한 ‘트렌디 드라마’(Trendy Drama 현대적 도시공간에서 이뤄지는 매력적인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주조로 한 해피엔딩의 드라마)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며 시청율 고공행진을 이끌었습니다.
청소년들의 인기만화였던 ‘캔디’를 통해 비유하자면 故최진실은 캔디, 안재욱은 멋진 남자주인공인 ’테리우스‘였던 겁니다. 소녀팬들의 가슴은 마냥 설레었지요. 실제로 안재욱은 ’별은 내 가슴에‘ 이후 ’테리우스‘라는 닉네임으로 한동안 불리기도 했습니다.
안재욱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이 급증하면서 그를 필요로 하는 수요 또한 덩달아 많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별은 내 가슴에’의 후폭풍은 자연스럽게 여러 영화와 드라마 제작사들의 캐스팅 0순위로 안재욱을 꼽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소속사에는 출연을 요청하는 시나리오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안재욱이 차기 출연작으로 결정한 것이 영화 ‘찜’이었으니 그를 캐스팅하려던 다른 영화사들은 그저 부러운 시선을 보낼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획영화들의 제작 시스템이 점차 자리잡아가는 가운데, 이처럼 ‘티켓 파워’를 지닌 배우가 영화계로 진입한 것에 대해서 고무적인 입장이었지요.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효과를 가져오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 취한 친구 누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장면을 찍기 위해 배우들에게 설명하는 한지승 감독(왼쪽). 그리고 안재욱과 김혜수.
안재욱의 캐스팅으로 ‘찜’의 영화기획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 ‘찜’은 영화 촬영기간 내내 대중의 관심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안재욱의 열성 팬들은 간식거리 등을 한아름 싸들고 촬영현장을 응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안재욱을 두고 한류의 원조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입니다. ‘별은 내 가슴에’가 중국과 중국어권에 방영되면서 안재욱의 팬덤 현상이 중화권으로 급격하게 확산되었던 거지요. 게다가 ‘별은 내 가슴에’에서 보여주었던 노래솜씨가 프로 수준이었던 터라 안재욱의 가수 겸업도 이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찜’은 이처럼 촬영 전부터, 그리고 촬영 후 완성되어 개봉될 때까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대중의 관심이 있는 곳에 당연히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도 따라갔습니다.
황기성 사단 제작 영화 '닥터 봉'(1995년, 이광훈 감독)에서의 인연으로 '찜'에서도 여자주인공을 기꺼이 맡았던 김혜수.
자신을 전혀 남자로 봐주지 않는 친구의 누나를 향한 남자 주인공(안재욱)의 저돌적인 애정공세는 관객의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술의 힘을 빌어 사랑고백을 해보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하고, 심지어는 만나지 않겠다는 선포까지 듣게 된 주인공. 노심초사하던 그는 여장차림으로 누나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이름하여 ‘여장남자’의 등장입니다.
연상연하 커플 컨셉도 다분히 앞서간 기획이었지만 여장남자의 등장은 또다른 파격이었습니다. 그동안 외국영화에서는 간혹 ‘미세스 다웃파이어’(1994년)나 ‘패왕별희’(1993년) 등을 통해 여장남자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한국영화에서 이처럼 본격적으로 여장남자의 활약상을 다룬 건 ‘찜’이 처음이었습니다.
안재욱이 여장남자로 등장해 펼치는 분량은 영화 전체 분량의 60% 이상이나 됩니다. 친구 누나에게 거절 당한 이후에는 거의 여장남자로 등장했으니까요.
촬영에 앞서 ‘여장’ 분장에 소요되는 시간도 만만찮았습니다. 안재욱도 난생 처음으로 ‘여장’을 해보는 것이었고, 또 ‘여장남자‘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원래부터 예쁜 여자였던 듯, 완벽 변신에 성공했습니다. 영화 완성 후, 언론시사회에서도 안재욱의 여장남자 연기는 단연 화제였습니다.
특히 영화 속에서 친구 누나로부터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고백을 듣고 겉으로는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 뒤, 집으로 돌아와 혼자 오열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조건만을 따지는 남자의 속물 근성에 참지 못하고 자신의 ‘비밀’(여장)을 밝히면서 일갈하는 대목에서는 많은 여성팬들에게 사이다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습니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필요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줄 수도 있어.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여장까지 하는 남자도 있어. 당신이 그런 걸 알아?”
MBC TV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의 인기여세를 몰아 영화 '찜'의 남자주인공을 꿰찬 안재욱. 이때부터 안재욱의 한류도 시작됐다.
얼핏 흥미위주로만 볼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한 감독은 깔끔한 연출솜씨로 심리묘사를 잘 해냈습니다. 안재욱의 열연 또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찜’에서의 열연이 청룡영화상의 신인상 수상으로도 이어졌으니까요.
‘찜’을 기획했던 황기성 사장의 관객의 흐름을 읽는 눈은 그후에도, 심지어는 최근까지도 여전히 번득이고 있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후궁- 제왕의 첩’(2012년, 김대승 감독)을 성공시키는가 하면, 지금도 가끔씩 대학로에 나가 젊은이들과 술잔을 부딪치면서 그들의 관심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황기성 사단에서 '고스트 맘마'로 감독 데뷔한 한지승 감독은 차기연출작 '찜'까지 연출을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