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8일, 영화계에는 가슴 아픈 소식이 하나 전해졌습니다. 강정수 감독의 부고(訃告)였습니다.
영화 ‘영심이’(1990년, 이미례 감독)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다가 ‘하얀 비요일’(1990년)로 감독 데뷔한 강 감독은 ‘우리 사랑 이대로’(1992년) ‘리허설’(1995년) ‘물 위의 하룻밤’(1998년) ‘런투유’(2002년) 등을 연출했습니다. 남녀의 사랑을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에 담아내며, 나름대로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감독이었습니다.
그런데 부고와 함께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강 감독의 척박했던 삶이 밝혀져 영화관계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영화 연출의 기회를 갖지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러 해 동안 당뇨합병증으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해왔다는 게 알려진 거지요. 또 세상을 떠나기 6개월여 전에는 지병이 악화되어 한 쪽 다리를 절단하기까지 했다는 소식에 많은 영화인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1959년생인 그의 나이 58세. 세상과 이별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때까지 미혼 상태였고, 부모 또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뒤여서 그에게는 유족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강 감독의 마지막 순간은 평소 가까웠던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고교 동창생들이 지켜야 했습니다.
때문에 서울 한남동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영화관계자들은 평생 영화만을 꿈꾸며 살다 간 그의 영정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봐야 했습니다. 더러는 조금 더 일찍 그의 어려움을 살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기도 했지요.
빈소에서 영화관계자들은 생전에 그가 만들어온 영화와 관련된 얘기들을 주로 나누었습니다. 밝고 명랑했던 고인의 성격 탓에 촬영현장은 늘 축제현장 같았다는 추억을 회고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끝내 미혼 상태로 세상을 떠난 고인의 생전 연애 담을 꺼내는 영화인도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리허설’(1995년)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한국의 애드리안 라인 감독으로 불린 故 강정수 감독이 파격적인 러브신을 담아내 화제를 모은 '리허설' 영화 속의 연극 장면. 박선영(오른쪽)과 방은희(왼쪽).
‘리허설’은 앞서 만든 영화 ‘우리 사랑 이대로’의 흥행성공에 힘입어 기획된 또 하나의 에로티시즘영화였습니다. ‘우리 사랑 이대로’의 유럽 현지 촬영 당시 여주인공 강문영의 ‘전라출연, 야한 여자 변신’ 등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듯이 ‘리허설’에서도 톱모델이었던 박선영의 ‘노출연기와 격렬 러브신’ 등의 이슈를 영화포스터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여기에다 당대 최고의 터프가이 최민수가 남자 주인공이었으니 두 남녀의 ‘에로 케미’가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지요.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부터 격렬한 러브신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담아내면서 영화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영화 '리허설' 속의 에로티시즘 연극에 출연한 박선영의 모습들.
주인공 민수(최민수)는 터프가이를 자처하는 백수건달입니다. 당연히 그의 주된 무대는 뒷골목이지요. 걸핏하면 싸움에 휘말리고, 더러는 돈을 받고 채무관계를 정리해주는 일이 그의 일상입니다.
어느 날 민수는 채무관계를 해결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연극공연장에 찾아갑니다. 이곳에서 민수는 극단여배우 승혜(박선영)를 만나게 됩니다. 좁은 무대 뒤편 연습실에서 대본연습 중이던 승혜는 낯선 남자의 방문을 외면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연습을 계속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듯한 승혜에 대한 호기심에 민수는 화장실로 따라들어 갑니다. 다짜고짜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민수. 완강하게 거부하는 승혜. 더욱 거칠게 밀어붙이는 민수.
완력으로 민수를 감당하지 못하는 승혜는 마침내 거부의 몸짓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데 승혜의 몸이 뜨겁게 반응합니다.(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성(性)에 대해 눈뜨게 되는 여자의 본능이라고 설명했지요)
연극무대 뒤편에서 연습중인 승혜(박선영)를 강제로 범하는 민수(최민수).
이날 이후 여자로서의 기쁨을 알게 된 승혜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민수는 그날의 사건이 단지 게임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묘한 감정이 살짝 드는 걸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민수와 승혜는 제주도 여행을 함께 다녀오면서 더욱 서로의 육체를 탐하게 됩니다. 승혜는 점점 더 사랑이라고 굳게 믿지만 민수는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경계합니다. 때문에 민수는 사채업자(윤문식)의 정부(김부선)와 의도적으로 잠자리를 갖고, 이를 승혜에게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국립극장으로부터 ‘내 사랑 히로시마’의 여주인공역을 제안 받은 승혜. 마침내 연극무대의 히로인으로 올라서게 된 승혜를 바라보면서 민수는 그녀의 곁을 떠나려고 결심합니다. 자신과 다른 길을 가야하는 승혜를 위해 스스로 관계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설상가상 사채업자 정부와의 밀회로 인해 사채업자 조직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 민수. 민수를 찾아 헤매는 승혜. 두 사람의 사랑의 행로는 어긋나기만 합니다.
승혜를 겁간하고 난 뒤, 승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 민수(사진 뒤, 포커스 아웃되어 보인다).
이야기 구조는 강정수 감독의 영화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랑 이대로’ 이후 강 감독에게 붙어 다니는 ‘한국의 애드리안 라인’(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의 감각적인 에로티시즘을 그린 ‘나인 앤 하프 위크’의 감독)이라는 닉네임이 어울리는 듯 보입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보이는 격렬한 러브신은 촬영현장에서도 늘 화제를 뿌렸습니다. 흔히 러브신 촬영을 위해서는 이른바 ‘공사’(남녀의 주요 부위에 커다란 밴드를 붙이는 작업)를 해야 하는데, ‘리허설’의 의상분장 담당 스태프들이 이 ‘공사’ 때문에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습니다.
러브신 촬영을 하다 보면 장면이 장면인지라 배우들도 진땀이 나기 마련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스태프들도 만약의 ‘사고’(공사한 밴드가 떨어지는 경우)에 대비해서 비상 대기하느라 진땀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리허설’의 러브신 촬영 중에 ‘공사 사고’가 꽤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다만 최민수의 위기 대처능력이 뛰어나 ‘공사 사고’ 때마다 원만하게 수습된 것으로 알려졌지요. 여기에는 여배우들의 ‘협조’가 한 몫 했습니다. 박선영은 톱모델 출신이긴 하지만 배우로는 완전 신인이었던 터라 최민수가 이끄는 대로 촬영을 마쳐야 했던 것이고, 김부선은 이미 ‘애마부인’ 등의 에로티시즘영화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인지라 상대역인 최민수가 ‘공사 사고’ 났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정도로 태연하게 촬영을 마쳤기 때문이지요.
이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알려지면서 ‘리허설’의 개봉을 앞두고는 대중의 관심영화로 떠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이때의 분위기로 보면 ‘우리 사랑 이대로’ 이상의 흥행성공을 거둘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영화개봉 이후 일부 고교생들이 ‘미성년자관람불가‘의 장벽을 뚫고(?) 극장으로 달려간 것 외에 영화를 보고 나온 대부분의 관객들은 파격적인 러브신 장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매끄럽지 못한 이야기의 전개와 억지스런 상황의 연출에 대해서는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여행 중 격렬한 러브씬을 마친 뒤에 두 남녀가 나누던 대화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여(박선영); 약속해줘. 여자는 이제 나뿐이다. 알지? 왜 대답 안해?
남(최민수); ---
바닷가를 거닐면서는 이런 대사를 합니다.
여(박선영); 난 비가 와서 좋아. 어렸을 때 비가 오면 울었어. 하늘이 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남(최민수); 바다냄새가 죽이네.
완전 생뚱맞은 시퀀스였습니다. 다만 작곡가 송병준의 영화음악은 제법 호평을 받았습니다.
또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더 도어스(The Doors)의 ‘Light My Fire‘ 등 삽입곡들도 영화의 무드를 제법 폼 나게 만들기는 했습니다.
'리허설'은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일부 청소년층에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나 허술한 스토리와 여주인공 박선영의 '발연기' 등으로 혹평을 받았다.
여주인공 박선영은 훗날, 어느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리허설’ 촬영 당시의 비화를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최민수씨가 당시 최고 영화배우였는데, 그분이랑 연기하는 게 너무 좋아서 노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안 쓰고 연기했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너무 힘들였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지요. 덧붙여 자신이 얼마나 ‘발연기’를 했는지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민수 오빠, 다시 한 번 오빠와 연기하게 된다면 그때는 ‘손 연기’할게요”라는 영상편지를 쓰기도 했지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리허설' 촬영 현장의 故 강정수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