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무비 스토리] `너에게 나를 보낸다`

기사입력 [2018-12-27 15:53]

'너에게 나를 보넨다' - 01.jpg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된 ’(문성근)는 당선작에 대한 표절시비에 휘말려 소설가의 꿈을 접은 채 도색소설을 쓰며 살아갑니다.


어느날 세계적인 엉덩이를 갖고 있는 바지입은 여자’(정선경)를 찾아옵니다. 미니스커트 중독증에 걸린 그녀는 의 소설에 나오는 꿈과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와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는 점차 그녀에게 지배되어 갑니다. 그녀는 섹스를 하는데 있어서도 를 리드해가고, 그녀의 세계적인 엉덩이를 무기로 철저하게 의 위에 군림합니다. 그럴수록 더 는 그녀에게 집착하며,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너에게 나를 보넨다' - 09.jpg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의 이 장면은 영화홍보전단에서도 사용됐다. '바지 입은 여자'(정선경, 오른쪽)가 '나'(문성근)에게 시키는대로 잘했다며 상을 주는 상징적인 장면.


한편 의 친구 은행원‘(여균동)8명의 부양가족을 거느린 성불구자로 봉급을 타면 한 달에 한번, 보너스를 받는 달에는 두 번씩 사창가를 찾아갑니다. 그 이유는 투입과 산출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는 그만의 독특한 철학 때문입니다.

은행원는 카페에 앉아 성()에 관한 시시껄렁한 얘기만 나눕니다. ‘바지입은 여자는 책에 정신병적인 편집증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자신의 엉덩이를 아주 헤프게 휘두르고 다닙니다.

어느날 의 이모(전숙)가 죽으면서 세 사람의 삶이 온통 뒤바뀌고 맙니다. 그녀는 예쁜 엉덩이 하나로 스타급 모델이 되며, ‘바지입은 여자의 가방모찌로 전락하고, ‘은행원은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르게 됩니다.

 

정선경_07.jpg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여주인공 '바지 입은 여자' 역의 정선경은 당시 수많은 여배우들의 오디션 끝에 낙점됐다.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장선우 감독)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1992년에 출간된 장정일 작가의 문제적 소설(동명)을 영화화한 작품이지요. 외설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내용에서 보듯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실제로 제작사(기획시대)는 영화의 개봉 전부터 청바지처럼 꽉 끼는 포르노그라피라는 카피를 앞세워 홍보전단을 뿌렸습니다.

하지만 영화홍보 전단 등의 마케팅 전략으로만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낸 건 아니었습니다. 이미 문성근, 정선경, 여균동 등 세 주인공이 얼마나 적극적이며 공격적으로 노출연기를 펼쳤는지 영화계 안팎으로 소문이 쫙 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선우 감독의 연출에 따른 것이지요. 장 감독은 “1980년대를 겪은 혼돈과 은유를 담아내려 했다연출의 변을 밝혔습니다만 기존의 한국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포르노그라피의 외피를 입은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문성근과 신인여배우 정선경은 전라연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섹스 장면에서는 마치 실연인 것처럼 리얼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정선경의 경우에는 이제 막 데뷔한 신인여배우의 연기라는 게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장 감독이 수많은 여배우들을 오디션한 끝에 낙점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요.

 

'너에게 나를 보넨다' - 08.jpg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 '나'(문성근, 왼쪽)는 여주인공 '바지 입은 여자'(정선경, 오른쪽)와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녀에게 지배되기 시작한다.

  

장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가진 시사회 석상에서 을 매개로 현대인의 굴절된 삶과 단절된 인간관계를 그리려는 영화기획 목표점에 어느 정도 근접했다며 자신감을 피력했습니다. 아마도 장 감독의 이러한 연출의 자신감이 신인 정선경의 대담한 노출연기를 이끌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필자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촬영 당시 현장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 남산에 위치한 영화진흥공사(지금의 영화진흥위원회) 세트장에서 ’(문성근)바지입은 여자‘(정선경)의 동거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대형 세트 촬영장이 경기도 양수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많이 있지만 당시에는 영화진흥공사 세트장이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화들이 이곳에서 세트촬영을 진행하곤 했습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영화화 소식이 전해질 때부터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터라 세트장에는 여러 매체의 취재기자들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필자가 세트장을 찾아간 날도 몇몇 기자들이 촬영현장을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다음 커트의 촬영 준비를 하느라고 장 감독은 연출팀과 함께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고, 배우들과 몇몇 제작스태프들은 잠시 분장실로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필자는 분장을 고치는 문성근과 촬영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노출 수위가 굉장한 것 같은데, ‘경마장 가는 길과 비교해서 어떤지?”를 물었습니다


문성근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 명료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가 그런 캐릭터라는 것이었습니다. ‘경마장 가는 길R은 위선자니까 섹스도 위선적이었지만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철저하게 바지입은 여자에게 종속된 순종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이기를 “‘바지’(정선경) 앞에선 쩔쩔매거든. ‘바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성근은 영화 속 여주인공 바지 입은 여자바지라고 줄여서 지칭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다음 커트 촬영 준비를 마친 연출부원이 분장실로 들어와 소리쳤습니다. “다음 커트, 촬영 들어갑니다. ‘바지나오세요!”

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문성근의 바로 뒤편에 누워있던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정선경이었습니다. 엑스라지 사이즈쯤의 헐렁한 점퍼를 입고 누워있던 그녀는 일어나 촬영현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입고 있던 점퍼를 벗었습니다.

순간 필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의 상체에는 점퍼 외에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필자의 놀란 눈빛을 쳐다보던 문성근이 빙긋 웃으며 한 마디 툭 던졌습니다.


저게 바지. 철저하게 바지로 빙의해서 현장에서 뒹굴고 있는 거지


문성근의 이 한 마디로 너에게 나를 보낸다라는 영화의 정체성이 단박에 느껴졌습니다. ‘바지입은 여자의 캐릭터도 한 눈에 읽혔지요. 아울러 정선경이라는 신인여배우의 대담한 연기 배짱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도 수긍이 갔습니다.

 

'너에게 나를 보넨다' - 07.jpg

영화 '경마장 가는 길'(1991년)에서 장선우 감독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던 문성근으로서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의 '나' 캐릭터에 어렵지 않게 녹아들어갈 수 있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101일 서울 종로3가의 서울극장에서 개봉됐습니다. 개봉하는 날부터 서울극장 앞 매표구에는 입장권을 사려는 관객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종로3가 지하철역 출입구까지 줄지어 늘어선 관객들의 모습은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흥행성적표가 이미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임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청바지를 뒤집어 입은 정선경이 엉덩이를 살짝 드러내고, 이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문성근과 여균동의 포즈가 담긴 영화 포스터도 관객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한몫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열띤 반응 또한 입소문이 되어 화제를 증폭시켰습니다.


실제로 외설적인 분위기를 견지하는 영화에서도 섹스 장면은 이른바 틴토 브라스나 잘만 킹 감독의 에로티시즘류()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됐습니다. 때로는 순정적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노골적이며 난폭하고 추악하게까지 그려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장 감독의 계산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얼핏 영화에서 보여지는 혼돈의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가 방향없이 사방팔방으로 튀는가 싶었는데, 바로 이 좌충우돌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대인의 자화상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냈으니까요.

 

'너에게 나를 보넨다' - 10.jpg

'너에게 나를 보넨다' - 05.jpg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주요 남자 캐릭터인 '나'(문성근)과 '은행원'(여균동)의 촬영장면.

  

그래서였을까요. 비평가들의 평가도 대부분 호의적이었습니다

성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의 대립으로 바라보는 비평가들의 호평 역시 관객들에게는 극장을 찾아갈 명분을 주었습니다.

서울관객 기준 42만 명의 흥행기록. 요즘의 멀티플렉스 상영시스템으로 환산하면 최소 700~800만 명 정도는 너끈히 되는 기록이었습니다


흥행 성공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열연한 정선경은 대종상영화제를 비롯해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춘사예술영화상 등에서 모두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단 한 편의 영화로 스타덤에 오른 거지요.


특기할만한 사실은 은행원역의 여균동이 청룡영화상에서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는 점입니다. 여 감독은 같은 해에 자신의 감독데뷔작인 세상 밖으로’(1994)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는데,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신인남우상까지 받은 겁니다. 하기는 그후 여균동은 감독, 배우 뿐만 아니라 문화평론가, 작가, 번역가, 심지어는 화가로서 전시회를 갖기까지 하는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장선우 감독은 대종상과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성공시대’(1988) ‘우묵배미의 사랑’(1990) ‘경마장 가는 길’(1991) ‘화엄경’(1993) 등으로 이어지는 장 감독의 전성시대를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다만 정선경의 경우에는 당시 영화계의 속설처럼 회자되던 장선우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는 빨리 스타덤에 오르지만 곧바로 하락세를 탄다는 징크스를 벗지 못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웠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너에게 나를 보넨다' - 03.jpg

'너에게 나를 보넨다' - 02.jpg

'너에게 나를 보넨다' - 06.jpg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촬영현장 장면들. 위의 두 사진은 장선우 감독이 현장을 지휘하는 모습이고, 맨 아래 사진은 비오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살수차를 동원해 물을 뿌리는 현장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