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23일은 한국영화사에서 꽤 의미있는 날로 기억됩니다.
미국 할리우드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컴퓨터그래픽(CG) 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제작한 영화 ‘구미호’(박헌수 감독)가 개봉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울 명동성당 입구의 중앙극장에서 개봉된 ‘구미호’는 신문과 방송의 영화광고로 단박에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전혀 새로운 영상세계‘라는 광고카피를 앞세워 한국영화의 컴퓨터그래픽 시대가 열렸음을 자신있게 알렸던 겁니다.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저마다 기대를 안고 스크린 앞에 앉았습니다. 과연 컴퓨터그래픽 기법이 어떻게 표현되어 스크린을 수놓을지, 그래서 인간이 구미호로 변하는 장면이 얼마나 그럴 듯하게 보여질지 등등.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구미호’에서 시도한 컴퓨터그래픽 기법은 촌스럽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사람이 구미호로 변한다거나 구슬이 칼로 변하는 등의 몰핑(Morphing- 컴퓨터로 하여금 일부 사물의 위치와 특성을 기억케 하면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사진합성기법)의 퀄리티는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습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러한 컴퓨터그래픽 장면이 나올 때마다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 탓이지요. ‘한국 최초의 CG영화’라는 광고문구가 무색한 수준에 그저 탄식만 할 뿐이었습니다. “쯧쯧, 한국영화는 아직 멀었구나”
관객들이 더욱 속상했던 것은 ‘구미호’가 개봉되기 1년 전에 이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공룡 판타지영화 ‘주라기 공원’(1993년)을 통해 입이 쩍 벌어질만한 컴퓨터그래픽의 향연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습니다.
오디션을 통해 '구미호'의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정우성. 당시 정우성은 노개런티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그래도 컴퓨터그래픽 기법을 한국영화에 도입하기 위해 애쓴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영화의 편 당 제작비가 5~6억원 정도였는데, ‘구미호’는 무려 16억원을 썼습니다. 평균 한국영화 제작비의 2~3배나 더 들어간 이유가 바로 컴퓨터그래픽 작업에 소요되는 비용 때문이었습니다.
하기는 이 규모 또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코끼리 비스켓’ 수준밖에 안되는 액수였습니다. 그래도 처음 보는 장비와 프로그램을 배워가면서 열정적으로 덤벼들었던 영화기술팀이 열정은 칭찬받을 만 했습니다. 당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시스템 공학연구소’와의 협업을 통해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판타지를 스크린에 담아낸 ‘첫 삽’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현란한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가능케 한 것이었으니까요.
‘구미호’를 기획한 제작사(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일찌감치 한국영화의 기술적 발전에 눈을 뜬 ‘프론티어’였습니다. 얼핏 무모해보이는 이러한 기획과 제작을 과감하게 시도하면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요. 실제로 신 대표는 ‘구미호’에서의 도전과 실패를 밑거름 삼아 2년 뒤에는 무협멜로판타지 ‘은행나무 침대’를 그럴싸하게 만들어냈고, 또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구미호'의 남녀 주인공 정우성 고소영은 어색한 연기로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여우에 대한 이야기인 ‘구미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비단 한국 최초의 CG영화라는 점 외에 남녀 주인공에게도 쏠렸습니다. 여주인공 고소영은 ‘구미호답다’는 소릴 들을 정도의 미모를 뽐낼 때였지요. 또 처음으로 연기를 시작하는 정우성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남다른 하드웨어’로 여성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하기는 고소영도 ‘구미호’가 영화 데뷔작입니다.
그 무렵 장안의 화제 드라마로 떠올랐던 ‘엄마의 바다’(MBC TV)를 통해 인기를 구가하던 여세를 몰아 영화에 도전한 것이었지요.
원래 구미호 역에는 당시 영화계의 캐스팅 1순위로 꼽히던 심혜진이 물망에 올랐으나 ‘구미호’의 제작사(신씨네)로부터 ‘구미호’보다 ‘결혼 이야기’(1992년, 김의석 감독)의 속편에 출연해줄 것을 요청받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구미호’의 출연을 포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구미호’의 캐스팅 제안이 고소영으로서는 당연히 욕심을 낼 만한 상황이었지요. ‘엄마의 바다’의 인기여세를 영화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으니까요. 그리고 대중도 톡 쏘는 매력으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던 고소영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따라서 정우성과 고소영의 캐스팅 조합은 신인급 배우들이었음에도 외견상으로는 톱스타급 못지 않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던 겁니다. ‘하드웨어’만으로도도 훈남훈녀의 멜로라인이 저절로 연상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구미호의 모습은 너무나 평면적이었습니다. 999년 동안 이승을 떠돌며 진정한 사랑을 갈구한다는 구미호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오디션을 통해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정우성 역시 첫 연기에 긴장한 탓인지 그 잘생긴 외모가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굳은 표정이 나타나기까지 했습니다.
TV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 함께 출연했던 고소영과 독고영재(오른쪽)은 '구미호'에서 또다시 호흡을 맞췄으나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다.
고소영과 정우성 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퀄리티가 떨어지는 컴퓨터그래픽 장면들로 인해 실소를 금치 못하던 관객들은 정우성과 고소영의 엉성한 연기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연기라는 걸 해야 했던 정우성이 버벅대는 건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엄마의 바다’ 등을 통해 ‘연기 좀 한다‘던 소릴 듣던 고소영이 갈피를 못잡고 헤매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고소영은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의 노출연기를 펼쳐야 했는데, 철저하게 대역연기를 고집하는 바람에 박헌수 감독과 제작스태프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비단 몸 연기만 대역을 쓴 게 아니라 위협적인 구미호로 변할 때의 목소리 연기까지 대역을 써야 했습니다. 999년 묵은 구미호가 굵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장면에서 성우의 목소리를 듣게 된 관객들은 70~80년대의 후시녹음 영화시대로 돌아간 듯한 씁쓸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고소영의 개런티가 5천만원이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영화계 안팎의 반응은 더욱 싸늘해졌습니다. 당시 톱스타급의 영화출연료가 4천만원~5천만원 선이었습니다. 안성기 최민수 심혜진 최진실 등이 5천만원 정도의 개런티를 받고 있을 때였기에 고소영의 개런티는 다분히 과대포장됐다는 평가를 들었던 거지요.
그래서였을까요. 비평가들은 ‘구미호’의 컴퓨터그래픽 기법을 도입한 시도에 대해서는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유난히 배우들의 연기에 호된 비판을 가했습니다. 정우성 스스로도 훗날 자신의 영화데뷔작인 ‘구미호’의 연기에 대해 “나무토막 하나가 왔다갔다 하더라”라면서 혹평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구미호’의 연기력 논란은 비단 두 남녀 주인공에만 쏟아진 게 아니었습니다. 저승사자 역할을 맡았던 독고영재 또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코믹 연기로 구설에 올랐습니다. 독고영재 역시 화제의 TV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 중후한 매력으로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며 ‘국민오빠’ 반열에 올랐던 터라 관객들의 실망감이 적지 않았습니다.
박헌수 감독 또한 ‘구미호’가 연출 데뷔작이었습니다만 컴퓨터그래픽과 배우들의 연기 컨트롤 등과 관련해서 연출력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박 감독은 90년대 최고의 로맨틱코미디영화 ‘결혼 이야기’의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영화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감독 데뷔한 것이었는데, 그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셈이 됐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렇게 관객과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흥행성적은 준수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서울관객 기준으로 거의 18만 명에 육박하는 기록으로 이른바 손익분기점을 상회했습니다. 컴퓨터그래픽에 대한 논란, 배우들의 연기력 논란 등이 오히려 의도하지 않았던 ‘노이즈 마케팅’으로 둔갑한 셈이었습니다.
한편 ‘구미호’에서 호된 영화연기 신고식을 치렀던 정우성과 고소영은 그후, 여러 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며 그동안의 연기력 논란을 잠재웠습니다. 한때 고소영은 ‘구미호’에서의 혹평으로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는데, 정우성의 설득으로 ‘비트’(1997년, 김성수 감독) ‘러브’(1999년, 이장수 감독)에 동반출연하여 고소영 특유의 상큼한 매력을 잘 살려냈지요.
현재 정우성은 설명이 필요없는 활약을 펼치고 있지요.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멋진 연기를 선보이는 국대급 배우로 우뚝 섰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