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으로 이루어진 대통령 직선제 등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는 점차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주화의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지요. 특히 사전검열 등의 조치로 억압되었던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마치 봇물터지듯 다양한 작품들이 잇따라 등장했습니다.
영화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전같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X양 사건’을 영화로 옮긴 ‘서울무지개’(1989년, 김호선감독)를 비롯해 자본주의의 폐부를 건드린 ‘성공시대’(1988년, 장선우 감독), 도시 빈민의 삶을 그린 ‘칠수와 만수’(1988년, 박광수 감독), 노동운동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그들도 우리처럼’(1990년, 박광수 감독) 등의 영화가 시내 중심가의 극장에서 상영됐습니다.
물론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다룬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의 ‘파업전야’(1990년)는 상영관 폐쇄, 필름과 기자재 압수 등 군사정부의 고질적 악습에 의해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영화 소재의 제약은 사뭇 자유로워졌지요. 오늘 이 컬럼에서 소개하는 영화 ‘독재소공화국’(1991년, 진유영 감독) 역시 그런 사회적 현상에 편승한 작품이었습니다.
‘독재소공화국’은 당시 배우 겸 감독으로 활동했던 진유영이 타고난 광대임을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엄격한 규율과 비민주적인 훈련으로 가득한 남학생 전용 하숙집을 ‘독재소공화국’에 비유한 것이었으니까요. 군사정부의 DNA를 지닌 노태우 정부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 없는 영화였지요.
대학가의 남학생 전용 하숙집을 '독재 소공화국'으로 설정하여 당시 정치적 상황을 풍자했다. '민주학사골' 유니폼을 입고 입촌 학생들을 면접하는 지도위원(박준규).
진유영은 조흔파 원작의 ‘얄개전’을 영화로 만든 ‘고교얄개’(1976년, 석래명 감독)로 유명해진 하이틴 배우 출신입니다.
‘얄개전’은 6.25 전쟁 후 궁핍했던 시절 청소년들의 인기를 얻었던 소설이었습니다. 1950년대는 너나 할 것 없이 혹독한 삶을 살아야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부모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기 위해 집을 나서야 했고, 집안에 남겨진 자식들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돌보아야 했지요. 학교에 가는 것도, 방과 후 골목어귀에서 구슬치기를 하며 노는 것도 전쟁처럼 치러내곤 했습니다.
특별한 여가생활이란 게 없던 그 시절, 학생들의 눈을 잡아 끈 소설이 바로 ‘얄개전’이었습니다. 해방 후 한국 최초의 학생잡지였던 ‘학원’에 연재되던 명랑소설 ‘얄개전’을 읽는 건 까까머리 중고생들에게 최고의 문화활동이자 여가활동이었습니다.
소설에서는 중학생인 주인공 얄개(나두수)의 영악하고 조숙한 장난이 유쾌한 필치로 그려졌는데, 기성세대의 권위와 규범을 위반하는 일탈 에피소드들이 또래의 중고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지금 70대 중에는 아마 당시의 ‘얄개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전후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인기소설이었던 ‘얄개전’이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엔 ‘고교 얄개’라는 영화로 만들어진 거지요. 50년대 소설의 배경을 70년대로 바꾸고, 하이틴 배우들인 이승현 김정훈 진유영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빅히트를 친 것이었습니다.
‘고교 얄개’의 세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진유영도 이때 유명세를 탔습니다.
주인공 얄개 나두수 역을 감칠맛 나게 연기한 이승현은 국민배우로 떠올랐고, 꼬마신랑이었던 김정훈은 청소년 배우로서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진유영 역시 특유의 반항아 캐릭터를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살려냈는데, 재미있는 점은 진유영이 이승현 김정훈보다 세 살이나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20대 청년이 하이틴 배우 행세를 하게 된 거지요.
당시 진유영은 MBC TV 탤런트로 ‘제 3교실’ 등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다가 임권택 감독의 눈에 들어 ‘낙동강은 흐르는가’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촬영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교얄개’에 이승현의 친구 역할로 출연해달라는 석래명 감독의 끈질긴 요청에 못이겨 두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낙동강은 흐르는가’보다 ‘고교얄개’가 엄청난 흥행성공을 거두면서 진유영은 이승현 김정훈과 또래의 하이틴 배우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성인배우로서의 도약을 꿈꾸던 진유영으로서는 피치 못한 궤도 수정이었지요. 하는 수 없이 진유영은 대중의 기호에 맞춰 ‘삐딱한 고딩’의 캐릭터를 계속 맡아야 했습니다. ‘고교얄개’ 이후 여러편의 영화에서 이승현의 친구로 등장했지요.
엄격한 입촌 테스트를 통과하여 민주학사골에 들어온 대학생들의 입학식 장면. 학사골의 운영자인 김노인(이진수)이 훈시를 하고 있다.
그러다가 진유영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원래 자신의 궤도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3년간의 군입대를 택한 겁니다. 대중의 눈 앞에서 잠시 사라지는 것만이 ‘고딩’의 색깔을 벗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그동안 영화출연 등으로 모은 돈 10만을 들고 훌쩍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변신’을 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연고도 없는 미국에서 그는 접시닦이 등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4년여를 버텨냈습니다. 이 무렵에 미국 올로케이션으로 촬영된 영화 ‘깊고 푸른 밤’(1985년, 배창호 감독)에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깊고 푸른 밤’을 촬영하는 동안 배창호 감독, 안성기와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한국의 영화게가 변화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깊고 푸른 밤’이 한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힘입어 진유영도 4년여의 미국생활을 접고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진유영은 배우로서보다는 감독으로 데뷔하려는 포부를 가졌습니다.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들고 여러 영화제작사들을 찾아다니며 연출의 기회를 엿보았지요. 당연히 쉽지 않았지요. 할 수 없이 진유영은 직접 제작비를 조달하여 영화 ‘지금은 양지’(1988년)를 만들었습니다.
데뷔작의 연출력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인정을 받은 편이었습니다만 직접 제작한 영화의 흥행은 그야말로 ‘쪽박’을 찼습니다. 당시로서는 큰 돈이라고 할 수 있는 3억여원의 빚을 떠안을 정도였습니다.
채권자들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던 그는 영화 ‘인간시장 2’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이 영화 ‘인간시장’(1983년, 김효천 감독)의 주인공 장총찬 역을 맡아서 성공한 배경도 있었으니, 내심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실제로 그의 자신감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89인간시장 오! 하나님’(1989년)이라는 제목으로 만든 영화가 제법 성공을 거두었으니까요. 이 영화의 성공으로 그동안의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겸 그가 택한 길이 故 신상옥 감독의 영화 ‘마유미’(1990년)의 조감독이었습니다. KAL 858기 피격사건의 영화화라는 이유로, 또 한국 영화제작사상 초유의 13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대작이라는 이유로 비상한 관심이 집중됐던 영화였지요.
하지만 영화 ‘마유미’는 유족들의 피맺힌 절규를 외면한 채 성급하게 제작됐다는 등의 비판으로 국내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다만 북한에서 돌아온 故 신 감독의 ‘탈북보고서’라는 프리미엄으로 미국과 일본에는 꽤 높은 가격에 수출됐다는 뉴스가 나오기는 했지요.
민주학사골의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체벌 받게 된 학생들. 체벌장면을 다분희 의도적으로 희화화하여 찍었다.
‘마유미’에서의 인연으로 진유영은 영화 ‘독재소공화국’(1991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바로 ‘마유미’의 여주인공이었던 김서라를 캐스팅했기 때문입니다. 김서라는 ‘마유미’에서 KAL기 폭파범 김현희와 거의 흡사한 모습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연기력을 인정받았지요.
‘독재소공화국’에서는 남장(男裝) 연기를 펼쳐야 했는데, 당시 진유영 감독은 “내심 걱정했는데, 그게 기우였을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지요.
대학가의 유명한 남학생 전용 하숙집인 ‘학사골’은 괴팍한 스타일의 김노인(이진수)에 의해 독재적(?)으로 운영되는데, 이 ‘학사골’에 들어와 무사히 졸업하기만 하면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 때문에 학생들은 치열한 입촌 경쟁부터 군대 유격훈련 같은 극기훈련을 기꺼이 수행합니다. 일개 하숙집에서 병영에서나 있을 법한 극기훈련이라니,,바로 이 점이 암울했던 군사정권을 풍자하는 진유영의 노림수였습니다.
여기에다 데모금지, 음주흡연금지, 외박금지 등의 규율과 부딪치면서 빚어지는 소동들도 적지 않았지요. 진유영은 바로 이러한 소동들을 통해 재미를 주겠다는 연출본능을 십분 발휘했습니다.
작은 독재공화국으로 설정한 ‘학사골’. 그리고 독재하면 떠오르는 인물,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상케 하는 배우 이진수가 거의 주인공급인 김노인으로 열연했습니다. ‘제3공화국’과 관련된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박정희 역을 단골로 맡아온 내공이 ‘독재소공화국’에서도 변함없이 드러났지요.
민주 학사골 입촌 테스트 장면의 촬영. 여자라는 신분을 감추고 남장한 여주인공 김서라.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난 배우는 여주인공 김서라였습니다.
남학생 전용 하숙집인 ‘학사골’에 남장(男裝)으로 들어와 남학생들과 함께 뒹굴며 버텨가는 과정을 사실감 넘친 연기로 보여줬습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슴에 붕대를 감고 남자처럼 생활하면서 온갖 훈련들을 마다하지 않고 해내는 모습은 2년쯤 후에 제작된 박선영 주연의 ‘가슴달린 남자’(1993년, 신승수 감독)의 프리퀄(Prequel= 오리지널 영화에 선행하는 사건을 담은 영화) 같은 느낌마저 주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데미 무어 주연의 미국영화 ‘지아이 제인’(1997년)도 연상케 합니다.
김서라로서는 자칫 ‘마유미‘로 굳어질 수도 있는 이미지를 과감하게 털어내고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힌 계기가 된 영화로 기억될 겁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민주 학사골'의 김노인(이진수). 故박정희 대통령의 외모와 흡사하여 그는 늘 이렇듯 독재적 이미지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배우 겸 감독으로 활동했던 진유영. '독재소공화국'은 그의 풍자적 연출재능으로 찍어낸 영화다.
'민주 학사골'의 입학식 장면을 촬영 중인 진유영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