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1989년, 강우석 감독)이나 ‘비트’(1997년, 김성수 감독)처럼 청소년이나 젊은 층의 관객을 메인 타겟으로 한 하이틴 무비, 또는 청춘영화가 한때는 꽤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요즘처럼 관객층의 저변이 확대된 시절이 아니었던 터여서 가능했던 기획이었지요.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극장의 주요 관객층은 20~30대였으니까요.
얼핏 기억나는 영화들만 해도 ‘엽기적인 그녀’(2001년, 곽재용 감독)을 비롯해 ‘클래식’(2003년, 곽재용 감독) ‘늑대의 유혹’(2004년, 김태균 감독) ‘말죽거리 잔혹사’(2004년, 유하 감독) ‘다세포소녀’(2006년, 이재용 감독) ‘사랑하니까 괜찮아’(2006년, 곽지균 감독) 등이 젊은 층의 관객을 겨냥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상업적으로도 제법 성공을 거두었지요.
이보다 앞서 90년대에 만들어진 청춘영화들은 2000년대의 영화들에 비해 신파적인 요소를 훨씬 더 강조했습니다. ‘신파성’이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데 유리하다고 여겼던 거지요. 그런데 이 신파적인 요소들은 약간만 지나쳐도 ‘유치한 영화‘로 평가되는 ’양날의 검‘과도 같았습니다.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1991년, 조금환 감독)도 90년대 청춘영화의 전형 같은 영화였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흥행 성공으로 앞다퉈 제작되던 여러 영화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90년대 최고의 청춘스타 이미연과 홍학표가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에서 키스신을 찍는 모습.
다만 이 영화에서는 주연배우들의 캐스팅 라인업이 관객과 영화관계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최수종 이미연 홍학표 등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들이 총집합했기 때문입니다. 캐스팅만으로도 뉴스의 중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중에서도 홍학표의 영화출연은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미연이야 이미 KBS TV드라마 ‘사랑이 꽆피는 나무’와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통해 최고의 ‘책받침 스타‘로 인기를 구가하던 상태였지만 홍학표는 당시 막 떠오른 청춘스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에서 1994년까지 마치 시즌제 드라마처럼 제작방영된 MBC TV의 ‘우리들의 천국’에서 홍학표는 여주인공 故최진실과 함께 최고의 청춘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미남형이라거나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었던 그가 청춘스타로 떠오른 건 지금까지도 ‘의외의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얼굴이 동안이어서 그렇지 나이 또한 서른 살이었으니까요.
뛰어난 연기력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었지만 그의 인기 상승에는 다분히 풋풋하고 선량해 보이는, ‘친근 이미지’가 한 몫 했습니다. ‘우리들의 천국’이 나중에는 청춘드라마로 자리잡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홍학표(큰 아들)의 다섯 가족 이야기를 담아내는 홈드라마였습니다. 훈훈한 가정사가 펼쳐지는데, 시청자들은 홍학표의 바르고 착한 청년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던 겁니다.
홍학표의 인기가 올라가자 ‘우리들의 천국’도 홈드라마에서 홍학표의 대학생활과 연애 이야기에 더 많은 비중을 담아내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이 전략이 주효하면서 ‘우리들의 천국’도 청춘드라마로 문패를 바꿔 달게 된 겁니다. 홍학표는 드라마의 원작인 소설 ‘우리들의 천국’의 표지모델로까지 등장하게 되었지요.
흥행에 도움될 만한 이런 인기스타를 충무로 영화계에서 그냥 둘 리가 없었습니다. 여러 영화사들로부터 캐스팅 제안을 받고 있던 홍학표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영화가 바로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였습니다. 홍학표의 가세로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는 그야말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격이 되었지요.
홍학표(왼쪽)와 이미연은 달달한 러브스토리로 영화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해일(최수종)은 어머니를 버리고 재혼한 아버지(윤일봉)를 증오하며 자라나 폭력조직에 가담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늘 아버지와 격한 감정을 쏟아내면서 대립합니다.
하지만 이복동생 해성(홍학표)과는 어린 시절부터 가깝게 지냅니다. 착한 심성의 해성도 늘 이복형을 이해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려 애씁니다.
어느날 해일은 폭력사건에 휘말려 형사의 추적을 받다가 성당으로 숨어들게 됩니다. 그곳에서 해일은 기도하고 있던 은채(이미연)의 도움을 받고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은채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게 됩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흘러 다시 은채를 만났을 때, 그녀는 어느 사이엔가 해성의 연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해성 때문에 은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접어야 하는 해일은 심한 갈등을 겪습니다. 이는 은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형제와의 엉킨 사랑의 감정을 좀체로 정리하질 못하던 은채가 점차 해일에게로 마음이 기우는 걸 알게 되는 해성. 세 사람의 갈등은 더욱 극한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그러던 중 두 형제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임종 직전의 아버지로부터 그동안 비밀에 붙여왔던 친모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는 해일.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거둔 해일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조직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해일은 조직의 보복에 직면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해성이 해일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형 대신 목숨을 잃게 됩니다.
해성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는 해일, 그리고 은채 역시 해성을 마음 속에 묻고 해일과 함께 새로운 삶을 향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안방극장에서의 인기세를 업고 스크린 진출을 시도했던 홍학표(왼쪽). 그리고 상대역인 이미연(오른쪽)
전형적인 신파 멜로영화였습니다. 마치 수학공식처럼 그렇게 풀어냈습니다. 맑고 꾸밈없는 캐릭터로 설정된 해성과 홍학표는 그런대로 잘 어울렸습니다. 은채(이미연)를 향한 헌신적인 모습이나 은채와 해일(최수종)의 관계를 알게 된 뒤, 격한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 등의 연기는 홍학표다웠습니다. 홍학표의 캐스팅 효과는 충분했습니다.
이미연도 두 형제의 사랑을 받는 은채의 캐릭터를 특유의 안정된 대사톤과 담담한 연기로 깔끔하게 펼쳐냈습니다. “성숙미가 느껴진다”는 평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배우 개인들의 연기와는 달리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는 전체적으로 감정과다의 인상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단적인 예가 비오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비 개인 오후’를 제목으로 썼다고 해도 비오는 장면이 지나치게 많이 나옵니다. 특히 최수종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비가 내립니다. 그런데다가 최수종은 언제나 우산을 쓰지 않은 채로 비를 흠뻑 맞습니다. 비를 맞고 감기에 걸려 쓰러지기까지 하지요.
아마도 증오와 사랑의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해일의 캐릭터를 극명하게 드러내려는 연출 의도였을 텐데, 관객들은 오히려 최수종이 비를 쫄딱 맞는 장면에서 실소를 터뜨렸습니다. 어느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난 뒤, “그 정도로 비가 많이 오면 우산을 사서라도 써야 되는 거 아니냐”며 볼멘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감정 과잉은 라스트씬에 이르러 정점을 찍습니다. 위기에 처한 형을 구하기 위해 대신 나섰다가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된 홍학표에게 달려온 최수종과 이미연이 슬퍼하는 장면입니다. 가슴에 칼을 맞고 절명 직전의 홍학표는 할 말 다하고 숨을 거둡니다. 영화 속에서 거의 5분 가까이 되는 분량입니다. “이래도 안 울래?” 하듯이 쥐어짜낸 이 장면에서 일부 여성관객들이 눈가를 훔치기도 했지만 감정과잉이었습니다. 오히려 관객의 감정몰입을 방해할 정도였지요.
결국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는 홍학표 이미연 최수종이라는 인기 상종가의 청춘스타들을 캐스팅해놓고도 ‘유치한 영화’라는 평을 들으며 흥행에 성공하질 못했습니다. 비싼 비용을 들이고 실패의 고배를 들게 된 주요 원인이 지나친 감정팔이였던 셈입니다.
홍학표는 안방극장에서의 인기세를 업고 스크린 진출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다시 안방극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후 그는 ‘이 남자가 사는 법’(1994년, SBS) ‘며느리 삼국지(1996년, KBS) ’좋은 걸 어떡해‘(2000년, KBS) ’제5공화국‘(2005년, MBC) 등의 드라마를 통해 건재를 과시해 왔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의 촬영현장.
'비 개인 오후를 좋아하세요'의 촬영 중 모니터를 함께 보는 조금환 감독(사진 위 왼쪽, 사진 아래)과 이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