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3막 구조의 내러티브를 넘어 새로운 스타일의 이야기 구조로 한국영화에 새로운 형식미를 제시한 홍상수 감독이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에 이어 두 번째로 내놓은 영화가 ‘강원도의 힘’(1998년)입니다. ‘강원도의 힘’ 역시 내러티브(이야기)는 기승전결의 장르적 관습에서 벗어난 영화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구효서 작가의 소설 ‘낯선 여름’을 원작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강원도의 힘’은 홍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서로 불륜관계에 있던 남녀가 각각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지만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 않는 가운데 펼쳐지는 ‘사랑과 불륜’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홍상수라는 감독의 존재를 알렸다면 ‘강원도의 힘’은 홍상수라는 감독의 영화세계가 어떻게 구축되어갈 것인지를 짐작케 했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만 원작에서 가져왔을 뿐 이후의 영화들은 모두 홍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 작업조차도 ‘강원도의 힘’과, 다음 작품인 ‘오 수정’(2000년)까지만 일반적인 영화 만들기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의 영화 만들기 과정에는 완성된 시나리오가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의 영화를 만들 것인지 구상하고 난 다음에는 그저 대략적인 인물과 장소의 설정이나 이야기의 방향 정도만 잡아놓을 뿐이었습니다. 고작 20페이지 분량의 트리트먼트가 전부였습니다.
다만 촬영하는 날, 그날 찍을 분량의 이야기들을 구체화하고 대사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다듬어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품 속의 캐릭터와 장면들을 연기하게 될 배우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최종 버전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강원도의 힘'의 남자 주인공 상권 역의 백종학.
‘강원도의 힘’에서는 홍 감독의 이러한 영화철학이 하나둘씩 실체를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한국영화의 형식미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던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극적인 사건이라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스케치하듯 무미건조하게 담아낸 겁니다.
특히 강원도 여행을 떠난 주인공 남(백종원)과 여(오윤홍)가 같은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한 공간에서 부딪치지 않는 구조는 묘한 긴장감을 낳았습니다. 동일한 장소에 시간차를 두고 다녀가는 방식은 마치 서로의 흔적을 좇아가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그런가하면 여주인공과 제법 비중있는 관계로 등장하는 인물(김유석)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남자 주인공과 한 번도 직접 마주치지 않는데 반해 스쳐 지나가는 인물(눈이 예쁜 여자)과는 시차를 두고 남녀 주인공이 번갈아 만나게 하면서 영화적 은유를 던져주기도 했지요.
관객들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압니다. 그들이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 서로 마주치지 않으며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말이지요.
‘강원도의 힘’에서는 또한 두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한 신인배우 백종학과 오윤홍에게 매스컴의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백종학은 원래 서강대 졸업 후 미국 시라큐스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돌아온 영화제작 프로듀서였습니다. ‘억수탕’(199년, 곽경택 감독)과 ‘소름’(2001년, 윤종찬 감독)의 프로듀서를 맡았고, 단편영화를 찍으며 감독을 꿈꾸기도 했지요. ‘강원도의 힘’에는 홍 감독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출연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연기 경험이라곤 거의 없는 백종학이 의외로 연기를 곧잘 했습니다. 마치 ‘강원도의 힘’의 출연을 위해 준비된 듯한 배우라는 소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냈으니까요. 홍 감독의 연기지론인 ‘연기하지 않는 것 같은 연기’에 잘 맞아떨어졌다고 할까요.
‘강원도의 힘’ 이후 백종학은 바로 이러한 ‘연기하지 않는 것 같은’ 연기로 여러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도 프로필을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방향’(2011년)에 영화감독 역할로 출연해 특유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강원도의 힘'의 상권 역의 백종학(왼쪽)과 지숙 역의 오윤홍(오른쪽).
오윤홍 역시 ‘강원도의 힘’이 데뷔작이었습니다. 단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그녀 역시 신인답지 않은 연기솜씨를 발휘했습니다. 갸날픈 체구임에도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팽팽한 긴장감을 주었던 겁니다.
오윤홍은 이후에도 많은 영화와 TV드라마에서 연기활동을 펼쳐왔는데, 특이하게도 특별출연으로 나선 경우가 많았습니다. 얼핏 생각나는 영화만 해도 ‘이재수의 난’(1998년, 박광수 감독)을 비롯해 ‘녹색의자’(2003년, 박철수 감독) ‘’천하장사 마돈나‘(2006년, 이해영 감독) ’바람피기 좋은 날‘(2007년, 장문일 감독) ’황해‘(2010년, 나홍진 감독) ’베테랑‘(2015년, 류승완 감독) 등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대학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강원도의 힘'에서 강릉여행을 나선 지숙 역의 오윤홍(사진 아래 오른쪽)과 친구들.
유부남 대학강사 상권(백종학)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 지숙(오윤홍)과 사랑에 빠졌습니다만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기로 합니다. 이별의 상처를 안고 두 사람은 각각 같은 시간, 각자 다른 일행과 강원도를 찾습니다.
지숙은 친구들과 함께 강릉행 야간열차에 오릅니다. 강릉역, 오색약수터, 낙산바닷가, 낙산사 등등. 설악산 언저리에서 지숙은 ‘눈이 예쁜 여자‘와 마주친 뒤, 산기슭에서 팔딱거리는 금붕어를 발견하고 묻어줍니다. 그리고 그날 밤, 민박을 안내해 준 낯선 경찰관(김유석)과 술을 마십니다.
교수임용 청탁을 위해 교수의 집에 찾아간 상권은 조니워커 블루를 내밀고 돌아섭니다. 후배의 제안으로 둘은 야간 침대열차를 타고 강릉으로 향합니다. 비룡폭포, 케이블카, 대포항, 낙산사 등을 두루 여행합니다. 무심코 “그 친구랑 여기도 왔었다”면서 지숙과 함께 했던 강원도 여행을 회상하던 상권은 비룡폭포 어귀에서 ‘눈이 예쁜 여자’를 만나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일’을 이루지 못하고 현지의 나이트클럽에서 돈으로 여자를 사고 무미건조한 섹스를 합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지숙은 가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면 경찰관에게 전화를 하곤 합니다. 그리고
국 그를 만나기 위해 혼자 강원도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날밤, 지숙은 그와 섹스를 합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서울 인사동의 늦은 밤, 드디어 교수에 임용된 상권은 지숙을 불러냅니다. 오랜 이별 끝에 재회한 둘은 말없이 여관으로 향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이른 아침에 상권은 자신이 한때 다니던 출판사를 찾아갔다가 지하실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세숫대야 안의 금붕어 한 마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설악산 비룡폭포 근처에서의 촬영현장.
또 한 사람, 경찰관으로 등장하는 김유석 역시 ‘강원도의 힘’이 데뷔작입니다. 김유석도 이 영화에서의 인상적인 연기를 인정받았지요. 얼마전에는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한 영화 ‘돌아온다’(2018년, 허철 감독)에서 안정된 연기력으로 관객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강원도의 힘’에 대해서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했습니다만 아마도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겁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특별한 사건의 전개나 갈등, 클라이맥스, 결말 따위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대체로 대중적인 재미와는 거리가 있다고들 합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그렇습니다. 반면에 그의 영화에 열광하는 매니아들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홍상수 감독.
홍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체로 찌질하고 비겁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의 단골 레퍼토리인 ‘사랑과 불륜’의 이야기에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기적인 캐릭터들로 넘쳐납니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대화들을 앞세워 속물 지식인들의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들 영화에는 마치 홍 감독을 연상케 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가 평소에 교류하는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로부터 차용한 캐릭터들이라고는 합니다만 웬지 실제의 홍 감독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배우 김민희와의 ‘사랑과 불률’ 스캔들로 인한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영화는 변함없이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전 들려왔던, 그의 최근작 ‘강변호텔’이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기주봉)을 수상했다는 뉴스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1998년 당시 ‘강원도의 힘’ 역시 그해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부문’에 초청됐고, 청룡영화제의 감독상과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낙산사에서의 촬영현장.
낙산호텔 안(사진 위)과 낙산 바닷가에서의 촬영현장(사진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