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국사회에는 참으로 많은 뉴스들이 매스컴을 장식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졸지에 실직과 기업도산 등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IMF 사태’(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 요청)를 비롯해서 ‘국민의 정부’의 탄생을 가져온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항쟁과 12.12 군사 쿠데타의 장본인들인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들에게 무기징역과 17년 징역형이 확정된 판결 등은 오래도록 국민의 기억 에 자리했던 사건들이었습니다.
또 이 해 여름엔 대한항공 여객기가 괌에서 추락하여 228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빚어졌으며, 다이애나 전 영국 찰스 왕세자비가 프랑스 파리에서 자동차사고로 사망한 뉴스도 타전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즈음(8월 29일) 제1회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시작됐습니다. 이장호 감독이 초대 집행위원장으로, 현재 충무로뮤지컬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인 김홍준 감독(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프로그래머로 나서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첫 해 수상작 중 ‘부천 초이스’에 한국영화 ‘접속’(장윤현 감독)이 차지해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에는 이장호 감독과 함께 뉴코리안 시네마의 기초를 놓은 박철수 감독도 참석했습니다. 파격적인 영화형식과 주제의식으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아온 박 감독은 ‘어미’(1985년)로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이후 ‘안개기둥’ (1986년) ‘접시꽃 당신’(1988년) ‘물 위를 걷는 여자’(1990년) 등 여성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들을 다수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즉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열리던 무렵부터는 ‘박철수 필름’을 설립하고 인간의 일상에 카메라 포커스를 맞춘 저예산 독립영화들을 찍었습니다. 거식증을 소재로 음식과 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301-302’(1995년)를 비롯해 전통장례예식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유쾌하게 접근한 ‘학생부군신위’(1996년) 등을 발표했지요. 이때부터 박 감독의 영화는 다분히 실험적인 작가주의를 표방했는데, 이 컬럼에서 소개하는 ‘산부인과’(1997년) 역시 그 궤도선상에 있는 영화입니다.
1997년 1월, 박 감독은 신작의 촬영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언론사에 전했습니다. ‘산부인과’였습니다. 판이한 성격의 두 여의사가 운영하는 산부인과를 무대로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의 다양한 사연들을 다큐멘터리 터치로 담아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박 감독은 인간 성(性)에 관한 보고서(킨제이 보고서)이자 섹시한 쇼킹 코미디로 버무려보겠다는 연출 욕심을 나타냈습니다.
'산부인과'에서 여의사 정연 역을 연기한 황신혜.
충남 천안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크랭크인하는 날, 이 병원에는 박 감독의 신작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반영하듯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날 촬영현장을 찾은 취재진들이 가장 놀란 사실은 산부인과 병원 측의 전폭적인 촬영협조였습니다. 메인 병원 외에 새로 지은 병동을 아예 촬영세트처럼 빌려준 것이었습니다. 박 감독이 빠른 속도로 촬영하는 스타일이라고는 해도 병원으로서는 신축 병동의 오픈을 한달여 뒤로 미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병원에서 박 감독은 촬영일수로 보름, 15회차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병원 역시 정확하게 한 달 동안 영업을 하지 못했지요. 병원 측의 이같은 촬영협조 덕분에 영화 ‘산부인과’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산부인과’의 두 여주인공 황신혜와 방은진도 능숙한 산부인과 의사 포스의 ‘진료 연기’를 선보여 박 감독의 빠른 촬영진행에 일조했지요. 여기에는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구성해놓은 산부인과 전문의(정경숙 박사) 등 자문위원단의 도움이 컸습니다. 자문위원단의 조언에 따라 황신혜와 방은진이 일찌감치 아주대병원 등에서 실습교육을 받으며 산부인과 의사의 진료방법 등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판이한 성격의 두 여의사 역할을 맡아 호연을 펼친 정연 역의 황신혜(빨간 원피스)와 혜석 역의 방은진(검은 색 상의).
밤낮으로 애 받는 일과 애 지우는 일에 신물이 난 산과의사 정연(황신혜)과 여성의 갖가지 질환들을 치료하는 부인과 의사 혜석(방은진)은 병원을 함께 경영하는 친구 사이입니다.
이쁜이 수술을 하면 남편의 바람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40대 아줌마로부터 줄지어 딸만 출산하는 딸의 소식에 망연자실한 친정엄마, 시험관 수정을 위해 온갖 방법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해야하는 남편들, 이도저도 잘 안되는 남편들을 위해 육탄공세도 주저하지 않는 간호사들, 심지어는 사고치고 난 뒤에 애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며 ‘낙태수술’과 ‘처녀막 재생수술‘에 앞장서는 한량들까지 산부인과 병원에서는 웃지 못할 사연들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뿐만 아니라 정연과 혜석은 때때로 섹스문제의 상담가로도 나서곤 합니다. 임신 중에는 어떤 체위로 부부관계를 가져야 하는지, 중장년기의 성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서는 성행위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등을 침 튀기며 강변하기도 합니다.
‘모성’보다는 ‘여성’을 강조하는 정연과 ‘여성’보다는 ‘모성’을 소중히 여기는 독신녀 혜석은 상반된 견해 속에서도 여러 상황들을 잘 대처해 나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두 사람은 모처럼 성공한 시험관 쌍둥이 아기의 출산을 앞두고 흥분한 나머지 기상천외한 ‘사고’를 치게 됩니다. 신생아실에서 아기들이 바뀐 겁니다. 아기들의 부모와 가족들의 거센 항의에 쩔쩔 매는 정연과 혜석. 산부인과 병원의 소란이 절정에 달합니다.
황신혜(사진 위)와 방은진(사진 아래)은 '산부인과' 촬영 전, 아주대병원에서 여러날 동안 실습교육을 받았다.
‘산부인과’는 1997년 5월 개봉됐습니다만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됐습니다.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일본의 어느 영화관계자는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 ‘산부인과’를 꼽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었습니다. “이제껏 본 영화들 중 출산 장면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영화는 난생 처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산부인과’에는 출산 장면이 여러번 보여집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킨제이 보고서’ 같은 느낌의 다큐멘터리를 지향한 탓에 배우의 연기가 아닌 실제의 출산 장면도 여러 번 등장했으니까요. 코믹 시츄에이션이 다분한 가운데도 생명 탄생의 신비와 숭고함이 절로 느껴졌을 정도입니다.
아울러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에 닥쳐올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함과 출산에 얽힌 다양한 인간군상들, 그리고 불륜과 외도, 불임과 낙태 등 마치 세미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마저 갖게 했지요.
여기에는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 역할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공이 컸습니다. 황신혜와 방은진은 '산부인과' 이전 작품인 '301- 302'(1995년)에서 이미 박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터라 서로의 눈빛만 봐도 속내를 알아채릴 정도였습니다. 특히 방은진은 진짜 의사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그리고 간호사 역할을 맡았던 신신애도 고려대 간호학과 출신답게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명나게 간호사 연기를 펼쳐 박수를 받았습니다.
충남 천안의 실제 산부인과에서 한달여 동안 진행된 '산부인과'의 촬영현장.
흥미있는 점은 ‘산부인과’의 개봉 당시 영화 포스터를 보고 ‘낚인’ 관객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산부인과’ 포스터의 메인 카피가 “모르는 척, 안 가본 척, 처음인 척”이었는데, 이게 산부인과 병원 안에서 일어날 듯한 ‘별의별 상상’을 갖게 했던 겁니다. 그러나 영화에는 그러한 상상을 충족시킬 만한 장면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블랙코미디로 표현된 장면이 많아 ‘야하기 보다는 웃기는’ 쪽이었지요.
그렇지만 시종일관 핸드헬드(카메라를 들고 찍기)로 촬영한 화면의 역동성과 거친 화면, 그리고 유머로 장착된 대사 등은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특히 박철수 감독의 영화를 선호하는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투박함이 ‘실험적 영화정신’으로 평가되기도 했지요.
‘산부인과’와 관련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작가주의 영화감독으로 독창적인 영화인생을 살아온 박철수 감독이 지난 2013년 음주운전 차량에 의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경기도 분당 작업실에서 신작 ‘러브 컨셉추얼리’를 준비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그 안타까움이 더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개봉당시 ‘산부인과’의 흥행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산부인과’의 개봉 시점에 정우성 고소영 주연의 청춘영화 ‘비트’도 개봉되면서 극장가의 관객들을 죄다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산부인과'에서 술 취해 난동을 부리는 환자의 가족으로 출연한 정원중.
고려대 간호학과 출신의 신신애(오른쪽)는 여의사 정연(황신혜, 왼쪽)을 돕는 간호사 연기를 실감나게 펼쳤다.
'산부인과' 촬영현장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포스로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직접 시연해보이며 꼼꼼하게 지시하는 故 박철수 감독.
충남 천안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촬영을 시작하기 전, 고사를 지내는 박 감독(사진 위)과 두 여주인공 방은진과 황신혜(사진 아래).
박 감독은 방은진(왼쪽), 황신혜(오른쪽) 두 여배우와는 '301- 302'에 이어 연속해서 '산부인과'에서 다시한번 함께 작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