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에서 본격적인 해외 로케이션(해외촬영)의 장을 열었던 ‘깊고 푸른 밤’(1985년, 배창호 감독)이 엄청난 흥행돌풍을 일으킨 이후 해외 로케이션에 대한 영화계의 의식도 전향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영화 소재나 스케일이 이처럼 훨씬 더 다양해지고 확장되면 보다 많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점 만큼이나 높은 제작비에 대한 부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깊고 푸른 밤’의 영향으로 해외 로케이션 영화의 기획이 이뤄지기 시작했으나 정작 현지 촬영으로까지 이어지는 데는 몇 년 더 필요했습니다.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년, 장길수 감독)가 ‘깊고 푸른 밤’의 해외 로케이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깊고 푸른 밤’의 로케이션 때는 사실 ‘퍼밋’(PERMIT, 촬영허가) 없이 몰래 촬영했습니다만 ‘아메리카 아메리카’는 촬영에 따른 ‘허가’ 등의 절차를 합법적으로 밟았습니다. 그만큼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철저하게 준비를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무렵에는 삼성 현대 대우 등 대기업의 자본이 한국영화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해 이전보다 여유있는 제작비를 쓸 수 있게된 점도 한 몫 했습니다.
80년대 말(末)에서 90년대 초반으로 넘어오면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년, 장길수 감독)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1991년, 이석기 감독) ‘땅 끝에 선 연인’(1992년, 이석기 감독) ‘아그네스를 위하여’(1991년, 유영진 감독) 등은 미국으로, ‘사의 찬미’ (1991년, 김호선 감독)는 일본으로, ‘파리애마’(1988년, 정인엽 감독) ‘집시애마’(1990년, 이석기 감독) ‘물 위를 걷는 여자’(1990년, 박철수 감독) ‘베를린 리포트’(1991년, 박광수 감독)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2년, 장길수 감독) 등은 유럽으로, ‘맨발에서 벤츠까지’(1990년, 이성수 감독)은 러시아 시베리아에서의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6개월여의 해외 로케이션을 펼쳤던 이혜영(왼쪽)과 손창민.
이후에도 해외 로케이션 촬영은 마치 트렌드인 듯 계속 이어졌습니다. ‘굿모닝 대통령‘(1992년, 이규형 감독)을 비롯해 ’우리사랑 이대로‘(1992년, 강정수 감독) ’하얀전쟁‘(1993년, 정지영 감독) ’땅 끝에 선 연인‘(1993년, 이석기 감독) ’그대 안의 블루‘(1992년, 이현승 감독) 등이 우후죽순처럼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다녀온 영화들이 ‘범람’(?)하면서 이들 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이 점차 시들해졌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국의 풍경도 반복적으로 대하다보니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관객의 냉담은 자연스럽게 저조한 흥행실적으로 이어졌지요. 오죽하면 ‘해외 로케이션 영화= 흥행실패‘라는 자조적인 등식까지 등장했겠습니까.
'아주 특별한 변신'에서 이혜영(왼쪽)은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력을 선보였고, 상대역인 손창민 역시 제 몫을 다해 연기했지만 영화흥행결과는 저조했다.
‘아주 특별한 변신’(1994년, 이석기 감독)은 해외 로케이션 촬영의 붐이 시들어가던 ‘끝자락’에서 해외 로케이션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미국 로케이션 영화들이 대부분 서부쪽에서 촬영했던 것과는 달리 이 영화는 거의 대부분 뉴욕에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그것도 한국영화의 해외 로케이션 중 가장 긴, 6개월여 동안 촬영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장기간의 해외 로케이션이 가능했던 것이 ‘아주 특별한 변신’을 찍은 이석기 감독이 해외 로케이션에 관한 한 잔뼈가 굵은 영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감독은 원래 촬영감독이었는데, 촬영감독 시절에도 ‘파리애마’라든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의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온 몸으로 체득한 베테랑이었습니다.
촬영감독 출신의 ‘감독 변신’으로 화제를 낳은 이 감독은 실제로 스페인에서 로케이션 촬영했던 ‘집시애마’에서 촬영감독과 연출을 겸업했습니다. 이같은 풍부한 해외 로케이션 경험을 바탕으로 6개월여에 이르는 뉴욕 로케이션 촬영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아주 특별한 변신’ 역시 ‘해외 로케이션 촬영=흥행실패’의 등식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당시 연기력과 화제성에서 정상급 배우였던 이혜영과 손창민을 남녀 주인공으로 캐스팅했음에도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이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스릴러 장르의 연출을 시도한 것이었는데,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멜로라인의 감성이나 끈끈한 휴머니즘 등 자신의 특기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복수극’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만 형국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변신'에서 이혜영은 영어대사 연기를 능숙하게 해냈다.
겨울 새벽, 뉴욕 맨하탄으로 향하는 거리에서 로빈(데이빗 스캇 클레인)은 우연히 한국여성 예지(이혜영)를 자신의 차에 태우게 됩니다. 첫 눈에 예지에 반한 로빈은 그녀를 내려준 할렘가를 뒤져 그녀를 찾아냅니다.
뉴욕 증권가의 거물 로빈은 정략결혼으로 처가의 회사를 가로챈 인물인데, 예지에게 반해 고액 연봉으로 그녀를 자신의 회사에 스카웃합니다. 예지는 수완을 발휘하여 뉴욕 비즈니스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르는 동시에 로빈의 정부가 됩니다.
이러한 예지을 유심히 지켜보던 로빈의 변호사 진우(손창민)도 서서히 예지에게 다가가고 마침내 두 사람은 불같은 사랑에 빠집니다. 예지와 로빈, 진우의 삼각관계 가 아슬아슬 펼쳐지는 가운데, 로빈은 아내와의 이혼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아침 로빈은 자신의 침실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뉴욕 경찰국의 케빈(암개)형사는 예지에게 혐의를 두고 수사망을 좁혀갑니다. 진우는 예지에게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면서 뉴욕경찰국의 수사를 혼선에 빠뜨립니다.
'아주 특별한 변신'의 촬영현장. 미국에서의 촬영을 마친 후, 부족한 부분의 보충촬영을 서울 도심의 공원에서 진행했다.
영화의 간략한 내용만 보면 그럴 듯한 ‘치정에 얽힌 스릴러‘가 나올 법 했습니다만 완성된 영화에서는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이 기대만큼 받쳐주질 못했습니다. 뉴욕 맨하탄의 초고층빌딩 풍광과 미국 현지 배우들의 출연도 스릴러의 흥미를 자아내는 요인이 되지는 못한 거지요.
그래도 이혜영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한국영화계의 명감독으로 남아있는 故 이만희 감독의 딸이라는 후광에 걸맞는 연기력이 ‘아주 특별한 변신’을 그나마 지탱시켜준 격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허스키 보이스를 통해 전달되는 영어대사 구사력은 일품이었습니다.
이혜영과 더불어 영어대사 구사력으로 눈길을 끈 배우가 또 한 사람 있었습니다. 홍승기. 크레딧에 <이종식- 홍승기>로 씌어 있는 홍승기라는 이름의 인물은 사실 배우가 아니라 변호사입니다. 현재는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만 ‘아주 특별한 변신’의 뉴욕 로케이션 당시에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연기에 대한 꿈이 있던 배우지망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대구MBC의 전신인 영남TV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후 그는 청소년 시절 내내 연극에 빠져 지냈습니다. 다만 그 무렵에 연극배우의 고단한 현실에도 눈을 뜨게 되어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할 자신이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법조계에 들어서던 무렵에도, 연기에 대한 갈증으로 어느 영화사의 신인배우 공모에 ‘가명’으로 지원서를 내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 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짬짬이 조단역 배우로 ‘외도’하는 걸 몹시 즐거워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변신’에서는 촬영팀의 진행과 통역까지 맡아하는 1인 3역을 감당했지요. 아쉽게도 ‘아주 특별한 변신’이 저조한 흥행실적을 거두는 바람에 그의 연기력을 감상한 관객수가 적었지만요.
그는 ‘아주 특별한 변신’ 외에도 지금까지 ‘늑대소년’(2012년, 조성희 감독) ‘연평해전’(2015년, 김학순 감독) ‘상의원’(2014년, 이원석 감독) ‘하류인생’(2004년, 임권택 감독) 등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해오고 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아주 특별한 변신'의 이석기 감독(왼쪽)과 여주인공 이혜영(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