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젊은 남자'(1994년, 배창호 감독)는 한국영화계의 대들보 배우 중의 한 명인 이정재의 영화데뷔작입니다. 이정재는 압구정동 카페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패션디자이너 하용수에 눈에 띄어 롯데 크런키 초콜릿 CF를 찍으면서 오늘에 이르게 됐지요. 당시 그는 초콜릿 CF의 폭발적인 인기와 훤칠한 외모 등으로 SBS TV드라마 ‘공룡선생’(1993년)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 드라마를 유심히 살펴보던 배창호 감독에 의해 영화 ‘젊은 남자’에도 캐스팅된 겁니다.
'젊은 남자'에서는 이한 역의 이정재 외에 신은경(사진 위) 등 상대 여배우들은 별로 보이질 않았다.
배창호 감독은 일명 ‘호스테스 영화’로 도배되던 70~80년대 한국영화계에 ‘꼬방동네 사람들’(1982년)을 시작으로 ‘적도의 꽃’(1983년) ‘고래사냥’(1984년) ‘깊고 푸른 밤’(1985년)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 등의 영화로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킨 주인공이었습니다. ‘한국의 스필버그’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그가 연출하는 영화들에는 구름 관객들이 몰려들었지요. 8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에서는 배 감독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면 제작사들마다 제작비를 대겠다며 앞다퉈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배 감독의 영화가 점차 작가주의적 경향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만드는 영화마다 흥행성공을 거두던 어느날, “왜 내가 영화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던 겁니다. 그리고 상업적인 결과 보다는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써의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자각에 이르렀지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황진이‘(1986년)와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년), 그리고 ’꿈‘(1990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갑자기 달라진 배 감독의 영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스필버그’에서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은 감독’으로 평판이 바뀌었습니다. 배 감독의 영화에 앞다퉈 제작비를 들고 오던 제작자들도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습니다. 몇몇 제작자들은 “예술영화 놀음에 미쳤다고 돈을 대느냐?”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결국 배 감독은 스스로 영화제작에 나서야 했지요. 연출과 제작을 겸해야 했던 겁니다. ‘배창호 프로덕션’이라는 이름의 독립제작사를 설립한 게 1994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배창호 프로덕션’의 첫 작품이 바로 ‘젊은 남자’였습니다.
배 감독은 독립제작사를 설립하면서 작품성 뿐만 아니라 상업성 또한 등한시 하지 않으리라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성공을 꿈꾸는 신세대 젊은이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만들고, 그에 어울리는 ‘미래의 기대주’들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정재를 발견한 겁니다.
실제로 영화 ‘젊은 남자’의 주인공 이한 역의 이정재는 배 감독의 목표치에 딱 들어맞는 배우였습니다. 물론 영화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정재 만큼은 관객의 뇌리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이한의 캐릭터, 신세대 젊은 남자의 감성을 선명하게 표현해 냈기 때문입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너무나 잘 어울린 나머지 혹시 실제 이정재의 삶도 영화 속 이한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으니까요.
'젊은 남자'에서 이정재(오른쪽)의 패션은 어떤 의상을 걸치거나 어떤 액세서리를 하더라도 '폼'이 났다.
특히 이정재는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매력을 영화 전편에서 한껏 드러내 보였습니다. 정장 슈트로 맵시를 낸 모습이나 또래 젊은이들이 좋아할만한 액세서리를 칭칭 휘감은 모습이나 한결같이 멋졌습니다. 무슨 의상을 걸쳐고 시쳇말로 ‘폼’ 났습니다. ‘젊은 남자’가 1994년 영화입니다만 지금 다시 봐도 이정재의 영화 속 모습은 그야말로 보석같이 빛납니다.
몇 년 전에 나온 영화를 다시 돌려보노라면 대개 영화 속 주인공들의 옷이나 헤어스타일 등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거나 촌스럽게 느껴집니다만 ‘젊은 남자’의 이정재는 여전히 자연스럽고 세련된 멋을 풍겨냅니다. 무려 24년 전의 영화인데도 말입니다. 그만큼 ‘젊은 남자’는 이정재에게 딱 맞는 옷과도 같은 영화였습니다.
'젊은 남자'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신은경(왼쪽)과 이정재(오른쪽).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화염에 휩싸인 자동차 안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오면서 시작됩니다. 이 사내의 이름은 이한(이정재). 욕망과 야망으로 뒤범벅된 도시 서울에서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모델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밤에는 환락을 좇아다니며 돈 좀 있다는 또래 여대생들을 만나 쉽게 만나 순간적인 사랑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발적인 매력을 지닌 여대생 재이(신은경)를 만납니다. 그런데 한과의 관계를 원나잇 스탠드로 끝내고 싶어하지 않는 재이는 다른 사람의 신용카드를 훔쳐가며 위험한 사랑에 빠져듭니다.
한에게는 소속사의 손실장(김보연)이 늘 걸림돌입니다. 손실장은 한의 야망을 미끼로 한을 스타로 키워주겠다면서 붙잡아 두지만 사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철저하게 이용합니다.
한편 한은 우연히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있는 승혜(이응경)를 만나 그녀의 지적인 매력에 빠집니다. 한의 매력은 연상의 여인 승혜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승혜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한은 승혜를 통해 자신의 구체적인 욕망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승혜의 도움으로 도약의 기회를 잡게 된 한은 소속사와의 계약서를 훔치기 위해 손실장의 사무실에 침입합니다. 그리고 계약서를 찾아 콧노래를 부르며 불태워 버립니다. 이때 갑자기 사무실로 들이닥친 손실장에게 발각되자 한은 그녀의 목을 조릅니다. 자신의 족쇄를 그렇게 벗어던집니다만 한의 운명 또한 비극적 종말을 예고하게 됩니다.
'젊은 남자'의 촬영 당시 신은경(사진 위)과 이정재(사진 아래)는 막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였다.
영화 속에서는 이정재만 보였습니다. 신은경도 이응경도, 베테랑연기자인 김보연도 별로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젊은 남자’는 이정재의 영화였습니다.
특히 로이 오비슨(Roy Orbison)의 In Dreams(꿈 속에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몇몇 장면들은 마치 ‘이정재를 위한, 이정재에 의한, 이정재의 명장면’이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이정재가 멋진 슈트 차림으로 앉아 어두워진 창밖을 향해 와인잔을 들고 창에 비쳐진 자신을 바라보면서 “넌 돼. 넌 되게 되어 있어”라는 독백과 함께 흘러나오는 ‘인 드림스’는 영화팬들의 감성을 흔들어놓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로마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야. 넌 돼. 넌 되게 되어 있어”
이 독백 장면과 ‘인 드림스’의 가사가 멋지게 조화를 이뤘기 때문입니다.
I close eyes then I drift away into the magic night
I softly say a silent prayer like dreamers do
(난 눈을 감고 마법의 밤으로 떠나갑니다.
난 꿈꾸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기도를 올립니다)
‘인 드림스’는 ‘젊은 남자’와 무척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습니다. 원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블루벨벳’(1992년)에서 사용되어 알려진 곡이기도 했습니다만 ‘젊은 남자’의 삽입곡으로 더욱 대중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8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킨 배창호 감독. 독립제작사를 설립하고 첫 작품으로 '젊은 남자'를 만들었다.
사실 ‘젊은 남자’는 영화적으로 볼 때,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젊고 매력적인 남자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여러 여자를 이용하다가 결국은 파멸에 이른다는 이야기 구조는 과거에도 여러번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서울관객 기준 6만명 정도였으니까요. 여기에는 ‘젊은 남자’의 개봉과 같은 시기에 강우석 감독이 박중훈과 최진실을 앞세워 만든 코미디영화 ‘마누라 죽이기’가 개봉된 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무튼 ‘젊은 남자’는 상업적 타산으로 보면 ‘본전’에 조금 못 미쳤습니다. 배창호 감독으로서는 독립제작사를 설립한 터라 최소한 차기 작품들 제작할 여건이 마련되기를 바랬습니다만 성공하지 못한 거지요. 결국 배 감독은 2년 쯤 지나서야 아내와 함께 연기까지 직접 해가면서 ‘러브 스토리’를 찍을 수 있었고, 또 그로부터 3년쯤 지나서 역시 아내를 여주인공으로 하여 ‘정’(1999년)을 찍었습니다.
이정재는 ‘젊은 남자’에서의 열연을 평가받아 대종상을 비롯해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영화평론가협회상 등에서 신인연기상을 휩쓸었습니다. 이정재에게는 잊지 못할 데뷔작이 된 거지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