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분단 고착화를 가져온 6.25 전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남아있지요.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으나 남쪽으로는 미군이, 북쪽으로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분단의 그늘을 드리우던 끝에 마침내 동족상잔이라는 엄청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으니까요.
3년여 동안의 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참혹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 기간 동안 사망자와 실종자만 2백만 명이 넘었으며, 부상자 역시 수백만 명에 달했습니다. 폭격과 전투로 인해 온통 폐허 천지가 되었으며, 이들의 복구비용에 천문학적인 액수가 소요됐습니다.
워낙 큰 아픔과 상처를 남긴 비극이었던 탓에 이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숱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주로 반공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지요. 한국영화 황금기라는 1960년대에는 반공영화들이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주요 장르로 자리잡았습니다. 대부분 북한인민군을 무찌르는 내용을 담았지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 이만희 감독)이나 ‘빨간 마후라’(1964년, 신상옥 감독) 등은 관객들의 인기를 꽤얻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도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심심치 않게 제작돼 왔습니다만 반공영화 일변도였던 1960년대와는 달리 다양한 시선으로 6.25 전쟁이나 그 전쟁의 이면을 바라보는 영화들도 많아졌지요. 물론 여전히 ‘오, 인천’(1981년, 테렌스 영 감독)이라든지 ‘포화 속으로’(2010년, 이재한 감독), ‘인천상륙작전’(2017년, 이재한 감독) 같은 ‘반공’의 기치를 앞세운 영화들도 있었지만 ‘웰컴 투 동막골’(2005년, 박광현 감독)이나 ‘서부전선’(2015년, 천성일 감독), ‘오빠생각’(2016년, 이한 감독) 등과 같이 처절한 전쟁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따뜻한 인간애가 피어나는 영화들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런가하면 6.25 전쟁의 한복판에서 지난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그려낸 영화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안정효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1년, 장길수 감독), 그리고 오늘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하는 영화 ‘아름다운 시절’(1998년, 이광모 감독) 또한 6.25 전쟁 당시 어렵게 살아가던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두살 소년의 시선을 통해 진솔하게 담아내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절'에는 수많은 아역배우들이 오디션을 통해 선발됐으며,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3개월여의 연기 리허설도 가졌다.
‘아름다운 시절’은 6.25 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1952년 여름부터 1953년 겨울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냅니다.
미군 장교와 사귀는 성민(이인)의 누나 영숙(명지연)의 주선으로 성민아버지 최씨(안성기)가 미군부대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성민네 살림형편은 점점 더 나아집니다. 반면에 성민네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창희(김정우)네는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고동업) 대신 어머니 안성댁(배유정)이 힘겹게 두 자녀를 돌봅니다. 가난에 힘겨워하는 안성댁과 그 가족을 위해 최씨는 미군의 속옷을 빨래해주는 세탁일을 알선해줍니다.
그런데 어느날 미군들의 빨래를 모두 도둑맞고 변상해줄 방법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 안성댁은 미군하사로부터 동구밖 방앗간에서 섹스로 이를 갚아줄 것을 요구받습니다.
한편 전쟁과는 아랑곳없이 아이들은 놀잇거리를 찾아 온동네를 헤집고 돌아다니는데, 성민과 창희는 동구밖 방앗간이 미군들과 양공주들의 정사장소임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과 함께 방앗간 뒤에서 정사 장면을 훔쳐보곤 하던 성민과 창희는 우연찮게도 안성댁과 미군하사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성민아버지 최씨가 망을 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다음날 방앗간은 원인 모를 불길에 휩싸이고 미군하사는 불에 타 사망합니다. 그리고 방앗간의 화재와 함께 창희도 아무런 소식도 남기지 않고 마을에서 사라집니다.
이듬해 여름, 늪에서 미군의 밧줄에 묶인 채 심하게 부패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창희와의 비밀 아지트에서 미군 라이터를 발견한 성민은 그 시신이 창희일 것이라고 확신하며 아이들과 함께 작은 무덤을 만들어줍니다.
휴전협정과 함께 창희 아버지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옵니다. 그는 실종된 아들의 가출이유와 방앗간 화재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마을사람들을 탐문하고, 성민의 누나 영숙은 임신한 채 미군으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성민 아버지 최씨는 불안한 앞날과 안성댁과의 과거가 들통나기 전에 창희네를 떠나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군창고에서 물건을 빼돌리다가 붙잡혀 빨간 페인트칠 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동안 아버지의 비겁함을 경멸하고 증오해오던 성민은 아버지를 외면합니다. 그저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연민의 마음으로 성민은 빨간 페인트를 닦아내는 아버지에게 물을 떠다줍니다.
그리고 이사를 떠나기로 결정한 그날 밤 성민은 꿈결에 죽은 창희를 만납니다. 잠에서 깨어난 성민은 창희의 라이터에 불을 켜봅니다.
영화의 마지막, 성민네의 이사짐을 실은 트럭이 굽이굽이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왔다가 다시 멀리 내려가는 장면을 익스트림 롱 숏(Extrem long shot-피사체를 극단적으로 멀리 넓게 찍은 숏), 롱 테이크(Long take - 커트를 나누지 않고 길게 이어서 찍는 방식)로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여러차례의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아역배우들.
아름다운 시절’을 찍은 이광모 감독은 고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만 미국 UCLA에서는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영문학도 시절에는 미국영화 외에는 별로 알지 못했던 이 감독은 유학하는 동안 ‘영화의 바다’에 풍덩 빠졌습니다. 유학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어떻게 하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밖에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유학파라고 해서 금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아름다운 시절’의 시놉시스를 설명하면 대부분의 제작사와 투자사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몇몇 동료 감독들과 ‘의기투합’해서 영화를 만들어보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똑같이 냉엄한 현실의 벽에 벽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얻어낸 결론은 직접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바로 한국의 극장가에도 버젓이 간판을 내걸게 된 예술영화의 수입 배급이었습니다. 몇 백만원씩이라도 벌면, 그 돈들을 모아서 영화제작비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이었지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현장에서 아역배우들은 마치 1950년대로 돌아간 듯,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그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한 영화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었습니다.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필견의 예술영화’로 회자되던, 그러나 화질 엉망인 비디오필름으로나 보아오던 그 영화를 서울 종로 한복판 극장에서 개봉했던 겁니다. 그는 예술영화 전문수입사 ‘백두대간‘의 대표로써, 영화 마니아들이 보고 싶어하는 외국의 영화들을 쉴 새 없이 수입해서 국내에 소개했습니다.
특히 이란의 세계적인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당시로서는 ‘깜짝 놀랄 스코어’인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영화마니아 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는 ‘백두대간’의 대표 명함을 갖고 다니면서도 찍고 싶은 영화에 대한 열망을 단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술영화들을 수입배급하면서 그 열망은 더욱 커졌습니다.
1995년, 그는 시나리오 컨테스트 중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하틀리- 메릴’ 시나리오 컨테스트에 ‘아름다운 시절’의 영어 시나리오를 출품해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의 영화 제작 꿈도 가시화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6.25 전쟁 이야기라는 것에, 그것도 그리 극적인 드라마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투자자들의 마음이 움직인 거지요.
마침내 영화의 투자가 결정됐을 때, 그는 치열한 전쟁을 치르듯 ‘영화 만들기’에 돌입했습니다.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대대적인 아역배우들의 오디션을 여러차례 진행하더니, 연기 리허설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아역배우들은 물론 안성기 송옥숙 등 기성 연기자들까지도 몇 개월씩 연기 연습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촬영에 들어가서도 ‘오케이 컷’이 나오지 않으면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다시 찍었습니다. 어떤 장면은 무려 32회를 찍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실 ‘아름다운 시절’에는 상당히 많은 장면에서 ‘롱 숏’과 ‘롱 테이크’로 찍었는데도, 그처럼 재촬영이 많았다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집념과 끈기로 '아름다운 시절'을 영화로 만들어낸 이광모 감독(오른쪽)과 선생님 역의 오지혜(왼쪽)
그리고 이렇게 6개월여의 촬영을 끝내고난 뒤, 후반작업 또한 거의 1년이 걸려 완성본을 만들어 냈습니다. 다행히 결과는 성공적이었지요. 일반 관객이 관람하기 쉽지 않은 ‘작가주의’적 영화였음에도 전국 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동경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도 많은 성취를 이뤘습니다.
당시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의 호평도 줄을 이었습니다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줄 평을 소개합니다.
“오랜 시간 고뇌와 완벽한 준비작업으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바라는 시스템으로 만들어낸 프로페셔녈”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아름다운 시절'의 주요 촬영지였던 섬진강 구담마을에서 여러달 동안 어려운 촬영을 거뜬히 이겨낸 아역배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