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 여승무원, 스튜어디스는 ‘하늘의 외교관’으로 불리며 지성미를 갖춘 커리어우먼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왔습니다. 특히 영화나 TV드라마, CF 등을 통해 등장하는 스튜어디스를 보면서 그들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배가되었지요.
그리고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시행 이후,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스튜어디스와 직접 마주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 호기심은 동경어린 시선으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이야 연간 2천만 명 이상의 국민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시대이므로 항공사 스튜어디스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심 등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주인공의 캐릭터를 스튜어디스로 삼은 영화나 드라마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가깝게는 지난해 초 방영된 KBS TV드라마 ‘우리집에 사는 남자’에서 여주인공 수애가 깔끔하게 묶은 헤어스타일과 각 잡힌 스카프, 유니폼으로 스튜어디스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수애의 ‘우리집에 사는 남자’에 앞서 방영된 KBS TV드라마 ‘공항 가는 길’에서는 김하늘이 경력 12년의 스튜어디스(부사무장)로 나와 빨간색 유니폼의 멋들어진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스튜어디스 캐릭터로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던 여배우들로는 김혜수 김현주 이민영 최지우 오연수 김희선 황신혜 혜리 황정음 김정화 등 톱스타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본격화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스튜어디스 캐릭터의 출현이 잦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처음으로 스튜어디스 캐릭터를 연기한 여배우는 김혜수였습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방영된 MBC TV 아침드라마 ‘짝’에서 그녀는 무려 4년 동안 스튜어디스 역할을 맡아 해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허락하지 않고 단정히 묶은 머리에 갈매기 눈썹, 짙은 입술 등 카리스마 넘치는 프로페셔널 커리어우먼의 매력도 한껏 발산했지요. 당연히 시청자들의 인기도 상당히 얻었습니다.
‘짝’에서는 김혜수 외에 김현주 이민영 등도 함께 스튜어디스로 나왔는데, 이들의 인기몰이와 더불어 스튜어디스 지망생들도 덩달아 늘어나는 ‘사회적 현상’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스튜어디스의 메이크업도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스터 콘돔'에서 항공사 내 커플 부부로 출연한 김혜수(왼쪽)와 김호진(오른쪽).
이후 2003년 SBS TV드라마 ‘요조숙녀’에서 김희선이 스튜어디스로 등장했는데, 그녀는 기존의 이지적인 이미지 외에 깜찍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더해 시선을 모았습니다. 특히 그녀는 이전의 스튜어디스 헤어스타일과 차별되게,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헤어스타일로 젊은 여성들의 헤어패션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2016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vN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여주인공 덕선 역의 혜리가 왈가닥 10대 소녀에서 스튜어디스로 변신한 성인의 모습으로 등장, 눈길을 끌었습니다. 혜리의 경우, 친동생이 실제로 스튜어디스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를 모았지요.
영화에서는 최지우가 ‘좋아해 줘’(2015년, 박현진 감독)에서 겉보기에는 야무지지만 늘 속고 당하는 어리버리형 노처녀 스튜어디스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늘씬한 키와 몸매로 완벽한 유니폼 패션을 선보였지요. 함께 출연했던 故 김주혁이 어느 방송프로그램에 나와서 “내가 본 스튜어디스 캐릭터 중에서 가장 완벽했다”고 소회를 밝혔을 정도로 최지우의 스튜어디스 캐릭터는 일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김혜수는 앞에서 언급한 MBC TV드라마 ‘짝’에 이어 영화 ‘미스터 콘돔’(1997년, 양윤호 감독)에서 다시한번 스튜어디스로 등장했습니다. 아이를 갖기 위해 애쓰는 젊은 부부의 해프닝을 담아낸 코미디 영화였는데, 여기에서 김혜수는 상대역인 김호진과 함께 항공사 승무원 부부로 나왔습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불임치료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성희(김혜수)와 성호(김호진). 진료실에서 나오는 '씨 없는 수박'의 유퉁(왼쪽).
영화에서 김혜수와 김호진은 항공사 내 커플 부부로 전형적인 신세대 딩크(DINK ~ Dobble Income, No Kids)족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말그대로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를 연기한 거지요. 미국에서부터 유행했지만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확산된 풍조로 ‘사회적 관심과 국제적인 감각을 지니되, 상대방의 자유와 자립을 존중하며 일하는 삶에서 보람을 찾는’ 걸 인생의 목표로 삼는 ‘딩크족’이 김혜수와 김호진에게 맡겨진 캐릭터였습니다.
산부인과에서 촬영중인 '미스터 콘돔'.
같은 항공사 내 커플 성희(김혜수)와 성호(김호진)부부는 전형적인 딩크족으로 항상 신혼같은 분위기를 자아내 주위의 부러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신혼 3년차에 접어들면서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성호와 아직 부모가 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는 성희의 ‘티격태격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한편 회사의 선배 경호(이경영)는 아들 넷을 둔 경험을 앞세워 성호에게 아내를 임신시키는 비법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 비법을 따라했는데도 성호가 계속 임신에 실패하자 성호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분위기를 띄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경호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는 찰나, 그동안 성희가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음이 밝혀집니다.
화를 내며 흥분하는 성호를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성희는 피임약을 복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후 성희와 성호 부부는 약속대로 아이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만 이상하게도 임신이 잘 되질 않습니다. 배란일을 계산하고, 체온을 유지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보지만 소용이 없는 겁니다. 민간 요법과 최첨단 의학을 동원해가면서 애를 쓰지만 결과는 언제나 ‘임신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심지어는 상상임신 해프닝까지 겪게 되면서 두 사람은 점차 지쳐가는데, 이 과정에서 정작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조차 잊어갑니다.
'미스터 콘돔'에서 전형적인 딩크족 부부로 호흡을 맞춘 김혜수와 김호진.
영화는 힘겹게 아이를 갖는 부부들의 고충을 진지하게 그려내기 보다는 우스꽝스런 해프닝들을 통해 웃기겠다는 데 목적을 지닌 듯 보였습니다. 여기에다 빠른 템포로 펼쳐지는 여주인공 김혜수의 도발적인 건강미, 그리고 김호진의 싱그러운 남성미 등이 어우러져 감독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영화들 중 흥행성적이 가장 좋았으니까요.
서울 관객 기준 16만명 정도의 기록이었으니까 ‘흥행 성공작‘으로 인정받았지요. ‘미스터 콘돔’과 같은 시기에 개봉한, 대대적인 광고와 마케팅의 물량공세를 앞세웠던 영화 ‘용병 이반’(1997년, 아무개 감독)은 겨우 1만3천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극장 간판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용병 이반’은 두고두고 ‘미스터 콘돔’과 비교되면서 영화기획 실패의 대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어야 했습니다.
한편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로 봐준 관객들과 달리 ‘미스터 콘돔’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데뷔작 ‘유리’로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는 등 국내외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던 양윤호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승부해야 할 신예감독이 일찌감치 흥행이라는 잿밥에 눈이 멀었다”고 혹평한 비평가도 있었지요.
또 여주인공 김혜수의 출연을 두고도 양윤호 감독이 대학(동국대 연극영화과)후배를 강권적으로 캐스팅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 감독과 김혜수는 대학시절부터 함께 단편영화 작업을 해오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맺어진 사이였음이 밝혀졌지요.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양 감독의 김혜수 캐스팅 배경이 바로 앞에서도 언급한 TV드라마 ‘짝’에서 보여진 스튜어디스의 모습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김혜수가 너무 실감나게 연기하는 바람에 양 감독으로서는 ‘앞뒤 잴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산부인과에서의 촬영 장면. 사진 위는 '씨 없는 수박'으로 나오는 유퉁. 사진 아래는 김혜수와 김호진에게 촬영 내용을 설명하는 양윤호 감독(오른쪽).
여배우 중에는 스튜어디스를 연기한 게 아니라 스튜어디스를 직업으로 가졌다가 배우로 변신한 이승연을 비롯해 아시아나 항공 모델 출신으로 연기활동에 뛰어든 경우도 꽤 많습니다. 아시아나 항공 모델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는 박주미는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미모를 앞세워 MBC TV 공채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그 뒤를 이었던 한가인과 이보영 등도 역시 연기자 변신에 성공했지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산부인과에서의 촬영 장면. 사진 위는 양윤호 감독, 사진 아래는 촬영된 장면을 모니터로 확인하는 양윤호 감독과 김혜수, 김호진(왼쪽부터).
'미스터 콘돔'의 산부인과 촬영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