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언제나 내게 등을 보이고 서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그 사람, 언젠가 나를 향해 돌아서주기는 할까요. 아직까지는 가끔 돌아봐주는 그의 눈길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눈길, 그것만으로 언제까지 더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 있는 내 등 뒤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나를 지켜줄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까지라도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려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너무 뒤늦게 깨달아버린 사랑이었습니다.“
“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신경숙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 ‘깊은 슬픔’(1994년)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은서와 현세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고향 이슬어지에서 함께 자란 여자 은서와 두 남자 완과 현세의 어긋나고 겹치는 사랑과 운명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담아낸 이 원작 소설이 1997년 동명의 영화 ‘깊은 슬픔’(故 곽지균 감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신경숙 작가 특유의 감성적 문체로 펼쳐지는 원작소설에서는 세 사람의 사랑과 운명이 어긋나면서 서로의 기대와 희망을 배반하는 이야기가 독자들을 사로잡아 초판(1994년) 발행 후 50만부 넘게 팔려나갔습니다.
신은경이 음주운전 사고로 '깊은 슬픔'에서 도중 하차하자 기꺼이 대타 출연에 나선 강수연.
베스트셀러 소설에 대한 영화화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작업이었습니다만 ‘깊은 슬픔’의 경우에는 특히 故 곽지균 감독의 강력한 영화화 의지에서 비롯됐습니다. 영화 ‘깊은 슬픔’의 제작사(동양미디어)는 곽 감독과 의기투합하여 원작 판권을 구입했고, 곽 감독에게 영화 제작의 전권을 맡겼습니다. 1996년의 일이었습니다.
곽 감독은 세 주인공의 캐스팅에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여주인공 은서를 원작의 청순 캐릭터와는 달리 선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한 캐릭터로 설정하는 바람에 캐스팅 과정에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겨울 나그네’(1986년)를 비롯해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년) ‘젊은 날의 초상’(1991년) 등 과거 곽 감독 자신이 공들여 캐스팅했던 영화들의 성공사례에 대한 자신감으로 밀어부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주인공으로 낙점된 여배우가 신은경이었습니다. 당시 신은경은 영화보다는 TV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MBC TV드라마 ‘종합병원’와 ‘마지막 승부’ 등에서 보시시한 매력으로 제법 인기를 얻었을 때였습니다.
신은경 캐스팅 확정 소식에 제작사(동양미디어)도 무척 고무된 분위기였습니다. 제작사는 신은경 캐스팅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 곽 감독 등 제작스태프들과 함께 “좋은 영화 기대한다”며 단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서울 남산의 하얏트호텔 지하 가라오케로 이어진 술자리 도중 ‘일’이 났습니다. 제법 취한 신은경이 집에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자신이 직접 운전하겠다고 고집을 피운 겁니다. 제작스태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은경은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우려했던대로 음주운전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튿날 아침, 신은경의 음주운전 사고 소식이 뉴스로 보도됐습니다. 새벽 무렵, 여배우 신은경이 음주운전하다가 갓길에 세워져있던 기동경찰대 버스를 들이받았다는 내용의 뉴스는 가십거리로 금세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여기에다 음주 운전 사고를 낸 신은경의 승용차 옆자리에 웬 젊은 남자가 동승하고 있었다는 루머까지 더해지면서 신은경 음주운전 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갔습니다.
결국 음전운전 사고로 구속되어 법정에 선 신은경은 “술은 딱 한잔만 마셨는데, 겁이 나서 음주운전 측정에 불응했던 것”이라면서 “아버지의 사업 실패 등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가장의 역할을 떠안은 걸 선처해달라”며 눈물로 재판부에 호소했습니다. 눈물의 호소 덕분인지 신은경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석방됐습니다.
하지만 신은경은 ‘깊은 슬픔’에는 출연할 수 없었습니다. 출연은커녕 우선은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톱스타의 모럴 해저드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언제나 그렇듯 싸늘했으니까요.
결국 곽 감독과 ‘깊은 슬픔’의 제작사는 캐스팅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캐스팅이 훨씬 더 힘들어졌습니다. 음주운전 사고로 신은경이 도중하차한 영화에 어느 누구도 선뜻 ‘대타’로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를 넘겨서도 캐스팅에 진전이 없자 제작사에서도 ‘깊은 슬픔’의 제작 포기를 고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구세주처럼 곽 감독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 강수연이었습니다. 모두들 신은경의 ‘대타’로 나서길 꺼린다는 상황을 전해들은 강수연이 곽 감독에게 먼저 출연의사를 전한 것이었습니다. 곽 감독에 대한 신뢰가 어느 누구보다 깊었던 강수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곽 감독과 강수연은 이미 영화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년)과 ‘장미의 나날’(1994년)을 함께 작업하면서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깊은 슬픔'에서 현세(황인성, 왼쪽)는 언제나 완(김승우)만을 바라보는 은서(강수연, 오른쪽)를 향한 외사랑으로 갈등한다.
강수연의 합류로 ‘깊은 슬픔’의 제작이 재개됐습니다. 남자 주인공 두 사람, 완과 현세 역에도 김승우와 황인성이 캐스팅됐습니다. 1997년 초여름부터 시작된 촬영은 한여름 내내 비지땀을 흘리며 강행군 일정을 소화했습니다만 9월 추석시즌에 개봉하기에는 시간이 다소 부족했습니다.
'깊은 슬픔'의 은서 역을 기꺼이 맡아준 강수연(사진 위), 그리고 완 역의 김승우(사진 아래).
고향 어슬어지에서 한 형제처럼 자라나 성인이 된 은서, 완, 현세.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은서(강수연)는 여전히 완(김승우)을 바라보고, 완은 다른 곳을 갈망하고, 현세(황인성)는 완에게 집중하는 은서를 바라보는 외사랑 관계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완은 고향을 떠나 폭력조직에 몸 담게 되고, 은서와 현세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함께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집니다. 은서를 향한 외사랑에 낙담했던 현세는 과거를 잊고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은서는 뜻하지 않은 완과의 재회 이후, 현세를 향했던 마음이 다시 완에게로 급격하게 기울게 됩니다. 현세는 완을 향한 은서의 마음에 절망하지만, 이내 다시 완이 은서를 떠나자 결혼을 서두릅니다. 그리고 결혼 후, 현세는 완을 향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은서에게 마치 복수하듯 모질게 대합니다.
영화의 후반부, 은서의 사랑을 모른 척 했던 완이 은서를 찾아옵니다. 이때 비로소 은서는 자신을 향한 현세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깨닫게 되지만 이미 현세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어긋난 사랑과 운명에 가슴 아파하던 은서는 마침내 이 모든 상처에서 헤어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한 형제처럼 자라나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 어긋난 사랑과 운명에 아파하는 '깊은 슬픔'의 세 주인공. 왼쪽부터 황인성, 강수연, 김승우.
강수연의 합류로 ‘깊은 슬픔’의 제작은 재개됐습니다만 제작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돌출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화 속 바이얼리니스트 은서의 공연 장면 촬영을 둘러싼 곽 감독과 제작사 간의 갈등은 꽤 심각하게 불거졌습니다. 가뜩이나 촬영이 늦어져 애타는 제작사의 입장과 영화의 퀄리티를 높이려는 감독의 입장이 부딪친 겁니다.
하지만 연주회장 대관료와 오케스트라의 출연 등 적잖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 장면이었지만 사실 완성된 영화 속에서 그 장면은 “그렇게까지 꼭 필요했나” 싶다는 반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깊은 슬픔’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음주운전 사고로 자숙의 시간을 갖는다던 신은경이 ‘노는 계집 - 창’(1997년, 임권택 감독)에 출연했는데, ‘깊은 슬픔’보다 먼저 9월 추석 시즌에 개봉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두달쯤 후인 11월에 개봉한 ‘깊은 슬픔’은 2만여 명의 관객동원에 그쳤습니다만 ‘노는 계집- 창’은 4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을 거두어 대조를 이뤘습니다.
당시 신은경의 ‘인생 반전’을 두고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만만찮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의리의 여배우 강수연은 실패하고, 모럴 해저드의 신은경은 반전에 성공했으니까요.
이래저래 ‘깊은 슬픔’은 깊은 슬픔을 여러 사람에게 안겨준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깊은 슬픔'의 아역배우들(사진 위)과 똑같은 모습으로 평상에 누운 현세(황인성), 은서(강수연), 완(김승우. 이상 사진 아래)
아역배우들(사진 위)의 장면을 촬영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성인 장면을 촬영하는 곽지균 감독(사진 아래, 노란 점퍼)
'깊은 슬픔' 촬영현장에서의 강수연.
강수연(왼쪽)이 자신의 아역을 연기하는 배우를 안고 곽지균 감독(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