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예쁜 두 눈에 향기가 어려 잊을 수가 없었네
언제나 우리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얘기들을 만들어가요
외로움이 다가와도 그대 슬퍼하지마
답답한 내 맘이 더 아파오잖아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대 나에게 사랑을 건네준 사람
1990년을 강타했던 강수지의 노래 ‘보라빛 향기’입니다. 미국 뉴욕 출신의 교포가수로 알려진 강수지는 이 곡 하나로 그야말로 벼락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일년내내 ‘보라빛 향기’는 ‘길보드 차트’의 주요 레퍼토리로 거리에 울려 퍼졌습니다.
지금은 저작권법의 강력한 시행에 따라 사라졌지만 80년대~90년대에는 길거리 리어카(노점상)에서 불법복제음반(정확하게는 테이프) 판매가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리어카상들은 출시되는 음반을 들어보고난 뒤, 대중에게 인기를 끌겠다 싶은 노래들을 집중적으로 틀어댔습니다. 이를 미국의 대중음악 순위인 빌보드 랭킹차트에 비유해 ‘길보드 차트’라고 불렀는데, ‘보라빛 향기’가 바로 1990년의 리어카상들에 의해 선정(?)된 ‘길보드 차트 1위곡’이었던 겁니다.
강수지는 단박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를 풍기는 가녀린 외모와 감성을 자극하는 음색으로 특히 청소년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다 히트곡 제조기로 일컬어지던 작곡가 윤상의 곡에, 실제로 사랑했던 한 남자를 생각하며 강수지가 직접 노랫말을 붙였다는 후일담까지 전해지면서 그녀의 ‘광팬’은 이루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습니다.
그해 연말, 한 해의 가요계를 결산하는 각 방송사의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강수지는 신인상을 모두 휩쓸었지요. ‘보라빛 향기’는 강수지의 이름을 청소년의 아이콘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90년대 대중가요계에도 커다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훗날, 여러 아이돌 그룹들이 여러차례 리메이크곡으로 발표했던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보라빛 향기'의 강수지(왼쪽)와 故 최진영(오른쪽) 등을 캐스팅, 청소년 관객을 타겟으로 삼아 기획한 영화가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였다.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년, 강우석 감독)는 이처럼 청소년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강수지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청소년 관객들을 타겟으로 삼아 기획한 영화였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건너온 지 1년여 만에 강수지는 가요계뿐만 아니라 영화계로부터도 ‘러브콜’을 받은 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강수지에게 ‘러브콜’을 보낸 주인공이 신성일(당시 성일시네마트 대표)이었다는 점에서 영화계의 관심 역시 비등했습니다. 한국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신성일이 이제 막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발을 들인 새내기를 자신의 제작영화에 캐스팅한 것 자체가 큰 뉴스였던 거지요.
그리고 새로운 감각의 청소년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던 강우석 감독까지 끌어들여 ‘드림팀’을 꾸렸습니다. 강수지와 호흡을 맞출 배우들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허석(지금의 김보성)과 역시 성일시네마트에서 제작했던 영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0년, 정지영 감독)에서 삭발 열연으로 호평받았던 故 최진영 등을 캐스팅했습니다.
1991년 여름방학 개봉을 목표로 촬영에 한창이던 5월, 제작사인 성일시네마트에서는 ‘보라빛 향기’의 강수지와 허석, 최진영, 그리고 안성기 등 출연배우들을 팬들과 만나게 하는 이벤트를 펼쳤습니다. 이름하여 “스타와 촬영현장에서 만납시다!‘였습니다.
촬영현장인 서울 강남구 학동의 영동고등학교 운동장에 1천5백명의 청소년들을 초청해서 촬영현장을 공개했지요. 영화 촬영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참가한 청소년들에게는 강수지의 ‘보라빛 향기’ 앨범과 정도상 작가의 원작소설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이벤트에 참가한 청소년들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만한 일이었지요.
이렇게 촬영현장까지 공개한 영화는 운동권 출신의 정도상 작가의 원작과는 사뭇 다르게 만들어졌습니다. 원작에서는 청소년들의 탈선과 폭력, 심지어는 마약까지 범람하는 세태가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었으나 강우석 감독은 원작의 메시지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당 부분 순화시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어둡고 고뇌에 찬 10대의 방황이 원작의 주된 내용이었다면 영화에서는 청소년들의 성장통 고민을 가벼운 터치로 그려냈던 겁니다.
김 선생(오른쪽, 안성기)은 여동생 채옥(왼쪽, 강수지)에 대해 늘 자상한 관심을 나타낸다.
학교에서 준석(허석)과 정만(최진영), 종수(강성진)는 학생들 사이에서 불량학생으로 통합니다. 특히 학생들에게 무책임한 체벌을 가하는 교사를 폭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건드릴 수 없는 존재들로 군림하게 됩니다.
교사폭행 사건 와중에 김 선생(안성기)의 여동생 채옥(강수지)를 알게 된 준석은 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깡패 세계를 기웃거리던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채옥을 향한 사랑의 열병을 앓는 준석은 자신의 행동을 바꿔보기 위해 애를 쓰는데,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깡패세계와 같은 조직의 추악함을 잘 아는 준석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으로 숨어보기도 하지만 이미 폭력과 섹스, 마약의 쾌락 등을 깡패세계에서 경험해왔던 정만과 종수는 추악한 쾌락의 유혹으로부터 쉽게 헤어나질 못합니다.
그러던 중 준석은 부탄가스를 흡입하던 종수가 폭발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마약을 먹고 깨어나지 못한 정만이 환각상태에서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도 듣게 됩니다. 준석은 자신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혼란에 빠집니다.
이러한 소식들을 전해들은 채옥 역시 이전의 모습을 바꿔보려고 애쓰던 준석의 결심이 자칫 흔들릴까봐 걱정합니다. 준석도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어두운 환경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 속을 뚫고 채옥을 향해 달려갑니다.
1991년 당시 히트곡 '보라빛 향기'로 청소년들의 우상처럼 떠올랐던 채옥 역의 강수지.
원작에서는 준석과 채옥, 종수 사이의 삼각관계의 사랑 이야기를 하나의 축으로, 또 준석이 속한 깡패 세계의 이야기를 또 다른 축으로 엮어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만 영화에서는 이처럼 희망섞인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준석이 속한 깡패세계의 이야기도 단지 준석과 채옥의 사랑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내는 감초같은 기능으로만 쓰였지요.
영화의 개봉에 맞춰 공개된 포스터의 메인 카피 역시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채옥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깡패 세계를 기웃거리던 불량학생 준석이 변화한다는 의미를 담은 거겠지요. 그렇게 해놓고는 웬지 낯간지러웠는지 영화전단지 카피에는 “공부도 못하고 뭐하나 잘난데 없는 人生을 우리는 더 사랑합니다!”라고 써넣었습니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간의 괴리 때문이었을까요. 영화는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를 얻고 말았습니다. 여름방학 개봉이고, 청소년들의 우상과도 같았던 강수지의 출연작이었음에도 말이지요. 인기스타의 출연이 영화의 성공을 담보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또한번 실감한 셈이었습니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얼굴을 알린 종수 역의 신인배우 강성진은 이후 착실한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미스터 맘마’(1992년)를 비롯해 ‘투캅스’(1993년), ‘마누라 죽이기’(1994년) 등 강우석 감독의 영화에 계속 출연하는 기회를 얻었지요. 그리고 열연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주유소 습격사건’(1999년, 김상진 감독)이나 ‘광복절 특사’(2002년, 김상진 감독), ‘실미도’(2003년, 강우석 감독) 등에서 개성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비오는 날 장면의 촬영에 앞서 스태프들에게 촬영장면을 설명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오른쪽). 왼쪽은 강수지, 오른쪽은 안성기.
촬영에 앞서 성일시네마트 영화사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있는 모습. 최진영, 강수지, 강우석 감독(사진 위, 왼쪽부터). 최진영 vs 강수지(사진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