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업계에서는 소비자들의 주목도를 높일 수 있는 요소로 흔히 ‘3B‘를 꼽습니다. ’3B’는 Beauty(미인), Baby(아기), Beast(동물)을 뜻합니다. 아마도 고개가 끄덕여질 겁니다. 웬만한 광고에는 늘 선남선녀와도 같은 모델들이 등장해서 제품을 써보라고 권하지요. 소비자들은 그 모습에 신뢰를 갖게 되면서 제품을 구매합니다.
꼭 유아용품 광고에만 아기들이 등장하는 건 아닙니다. 세탁기나 청소기, TV나 가구 등의 광고에도 곧잘 사랑스러운 아기와 엄마 모델들이 등장하지요. 아기의 모습에서는 그야말로 평화가 느껴집니다.
여기에 하나 더, 동물은 또 어떻습니까. 수많은 광고와 영화에 등장하는 개나 고양이, 혹은 말이나 돼지를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습니까. 이중에서도 특히 개는 워낙 종류도 많고 에피소드도 많아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물입니다. 오늘 이 컬럼에서 살펴보는 영화 ‘꼬리치는 남자’(1995년, 허동우 감독)도 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꼬리치는 남자'의 남녀 주인공, 맹인 향수 감별사 백재수 역의 박중훈(왼쪽)과 나레이터 모델 영은 역의 김지호(오른쪽).
“남자, 그들은 개가 돼도 응큼하다”는 영화포스터의 메인 카피에서처럼 이 영화의 컨셉은 ‘개로 변신한 엉큼한 남자의 여자 훔쳐보기’였습니다. 엉큼한 남자가 여자의 어딜 훔쳐보겠습니까? 이 엉뚱한 상상을 토대로 ‘꼬리치는 남자’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졌고, 엉뚱한 상상을 하는 엉큼한 남자 주인공으로는 박중훈이 낙점됐습니다. ‘꼬리치는 남자’가 제작될 당시 박중훈의 위상은 영화계 캐스팅 1순위로 자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투캅스’(1993년, 강우석 감독)를 비롯해 ‘마누라 죽이기’(1994년, 강우석 감독), ‘게임의 법칙’(1994년, 장현수 감독), ‘총잡이’(1995년, 김의석 감독) 등의 흥행성공으로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제작되는 영화들 중 70% 이상이 박중훈에게 출연을 요청했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런’ 박중훈이 바로 이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한 겁니다. ‘개로 변신한 사내’ 컨셉이 박중훈의 영화적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박중훈표 코미디’라는 말이 나왔을 만큼 그 역시 코미디연기에 관한 한 남다른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 다음으로는 개로 변신한 남자가 실컷 훔쳐볼 여자들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바로 이 대목에서 캐스팅이 난항에 난항을 거듭했습니다. 컨셉과 시나리오는 기발한 상상의 코미디였지만 은밀한 사생활을 드러내야 하는 캐릭터였던 터라 선뜻 여배우들이 나서지 않았던 겁니다. 시나리오에는 침실 장면이라든지 파우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라든지, 심지어는 욕실에서 샤워하고 알몸으로 나오는 장면들도 있어서 노출연기 또한 불가피했던 탓입니다.
결국 당시 TV와 CF에서 보이시한 매력을 드러내면서 막 떠오르던 김지호와 여성듀엣 코코 출신의 이혜영을 캐스팅하게 됐습니다. 제작사(기획시대)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던 캐스팅이었지만 ‘박중훈표 코미디’인 만큼 박중훈을 중심축에 놓고 기발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 충분히 승산 있다고 본 겁니다.
'꼬리치는 남자'의 출연을 결정할 당시 박중훈은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게임의 법칙' 등의 흥행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캐스팅 1순위로 꼽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스팅, 바로 개였습니다. 요즘은 국내에서도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동물들이 제법 많아졌습니다만 1995년 당시에는,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묘안이 미국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개를 임대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떠오르는 할리우드 영화 속의 개들만 해도 60년대 TV드라마 ‘랫시’를 위시해서 70년대의 영화 ‘벤지’, 90년대 할리우드영화에서 활약했던 ‘달마시안’이나 ‘베토벤’ ‘늑대개’ 등 견종도 매우 다양합니다.
‘꼬리치는 남자’의 경우에는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동물배우들을 모아놓은 ‘분스 애니멀스 포 할리우드’에서 ‘빙고‘와 ’아모이‘라는 이름을 가진 골든리트리버 두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개들과 함께 이른바 ’애니멀 랭글러‘(Animal Wrangler)도 같이 왔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동물들을 대본에 맞춰 훈련시키고 관리하는 ’애니멀 랭글러‘라는 전문가들이 꼭 동물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개는 한 마리이지만 두 마리가 필요했던 것은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서였지요. 그리고 가끔씩은 개의 피로감을 덜어주기 위해 번갈아 출연시키기도 하거든요.
나레이터 모델 영은 역의 김지호는 애초의 시나리오에서 묘사된 것보다 순화된 노출 연기를 펼쳤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향수 감별사’ 백재수(박중훈)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남자입니다. 향수 냄새로 사람의 성품을 알아맞출 정도로 향기에 민감합니다. 보지 못하는 대신 포르노비디오 소리 듣는 걸 좋아하고, 공원에서 여자들과 수다 떨며 사진찍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독특한 향기의 여인 영은(김지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여인을 만났다며 좋아하는 순간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습니다. 생명은 구하지만 평소에 자신이 구박하던 개 다롱이와 영혼이 뒤바뀝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백재수가 비록 개의 몸이지만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영은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 기뻐한다는 점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평소 그래왔던 버릇이 되살아나면서 여러 여자들의 은밀한 세계도 훔쳐보기 시작합니다.
'꼬리치는 남자'의 캐스팅 당시 김지호는 TV드라마에서 상큼한 이미지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을 때였다.
‘개가 된 남자’ 백재수 역의 박중훈은 캐릭터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멋진 색조의 정장과 선글라스 차림으로 ‘여인의 향기’를 사냥하러 다니는 모습은 그런대로 능청스런 바람둥이 같았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할리우드 영화 ‘여인의 향기’(1993년, 마틴 브레스트 감독)에서의 알 파치노를 염두에 둔 듯한 연기였지요. 그의 팬들은 ‘박중훈표 코미디’로 만들어진 ‘꼬리치는 남자’에 대한 기대를 많이 가졌을 텐데 말이지요.
김지호도 상큼한 마스크와 신인다운 풋풋한 모습으로 어필하느라 무던 애썼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엉큼한 남자가 훔쳐볼 정도로 ‘섹스어필’했는가에 대해서는 적잖은 의문부호를 남겼습니다.
허동우 감독은 신인이었지만 관객의 ‘훔쳐보기 욕구’를 잘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개가 된 백재수는 여자들의 침실과 옷방, 욕실을 드나들며 실컷 훔쳐봅니다. 그런데 결정적 한 방은 없었습니다. 이런 정도였다면 여배우 캐스팅 때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요. 아마도 신인감독의 입장에서는 ‘19금‘에 대한 부담을 느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완곡하게 에둘러 찍었지만 관람등급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나왔으니, 결국은 이도저도 아닌 셈이 됐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개 주인공 ‘빙고’와 ‘아오이’는 훌륭했습니다. 어쩌면 개들이 너무 연기들을 잘하는 바람에, 애초의 기획의도를 살리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진기명기에 가까운 개들의 연기에 카메라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영화로 펼쳐진 이야기는 오히려 시나리오보다 단조롭게 흘러가버렸던 겁니다.
때문에 흔히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의 공통점인, 따뜻한 결말도 “뜬금 없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해피엔딩을 유도하는 과정이 너무 억지스러웠던 거죠. 남녀 주인공인 재수(박중훈)과 영은(김지호)의 만남을 따뜻하고 예쁜 그림으로만 마무리하는데 치중했기 때문입니다. 왜, 어떻게 해서 예쁜 그림 같은 라스트신에 이르게 됐는지 아무런 갈등과정이 없는 채로 말입니다.
‘꼬리치는 남자’는 기획 아이디어가 기발했고, 시나리오도 당시의 ‘대세 박중훈’이 덜컥 잡았을 정도로 괜찮았으나 ‘용두사미’의 결과를 내고 말았습니다. 어떤 비평가는 “개에 치인 영화”라고도 했으니까요. (이창세 영화기획 프로듀서/news@isportskorea.com)
박중훈은 할리우드영화 '여인의 향기'에서의 알 파치노를 염두에 둔 듯한 맹인연기를 펼쳤다.
''꼬리치는 남자'의 포스터 촬영 장면.
개가 된 백재수(박중훈)는 여자들의 은밀한 곳을 훔쳐보는 버릇을 마음놓고 즐긴다. 상대역은 여성듀엣 가수 코코 출신의 이혜영(왼쪽).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의 촬영장면.
나레이터 모델로 제품 홍보하는 장면을 촬영 중인 영은 역의 김지호.
'꼬리치는 남자'의 허동우 감독(왼쪽)과 촬영을 앞두고 얘기를 나누는 김지호.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의 촬영장면.
미국 할리우드에서 임대해온 주인공 개 '아모이'(위)와 '빙고'(아래)